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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에 산 지 5년째였다.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를 타며 마주치는 이웃들과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그저 손을 뻗어 문 닫힘 버튼을 눌렀다. “바빠서 그랬다”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도, 사실 그는 이웃과 어떤 교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관계를 맺는 순간, 거기서 비롯될지도 모르는 의무와 불편함이 싫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의 과중한 업무와 인간관계에 지친 지훈은 결국 병가를 내고 휴직을 결정했다. 상사의 권유로 그는 오랜만에 고향 근처 시골마을에 사는 정애 할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휴대전화 알람 대신 새소리와 함께 깨어날 수 있는 몇 주간의 휴식이라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시골로 내려간 첫날, 정애 할머니는 환한 미소로 지훈을 맞았다. “얼굴이 반쪽이네, 우리 지훈이. 쉬러 온 건 참 잘한 일이다.” 하지만 마을은 그가 익숙한 도시와는 너무도 달랐다.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 집에 찾아와 자신을 소개하며 다가왔다. “서울서 온 친척분이라면서요? 어서 와요.” 지훈은 당황했다. 이곳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했고, 그들에게 관심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며칠 후, 정애 할머니는 김장철이니 돕자고 했다. 지훈은 탐탁지 않았다. “마트에서 사 먹으면 되지 않아요? 굳이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해요?” 정애 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김장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해야 맛도 나고 정이 들지. 그런 건 마트에선 못 사.”

김장날이 되자, 지훈은 억지로 따라 나섰다. 절임 배추를 나르고 양념을 버무리는 일은 그의 체력과 인내심을 금세 소진시켰다. 실수도 잦았다. 배추를 나르다 그만 양념통을 엎질렀을 때, 그는 얼어붙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나무랄까 두려웠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한 어르신이 웃으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처음부터 잘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정애 할머니도 “다음엔 더 잘하겠지. 걱정 마라.”라며 등을 두드렸다.

그날 저녁, 지훈은 김장을 마친 후 마을 사람들과 갓 담근 김치에 수육을 곁들여 먹었다. 사람들은 서로 웃으며 고된 하루를 나눴고, 지훈도 덩달아 웃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함이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이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웠다.

며칠 후, 한 마을 주민이 갑작스런 병원 방문으로 김장을 끝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훈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돕겠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진심을 다해 도왔다. 도움을 받은 주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런 일, 도시 사람들은 안 한다던데.”

도시로 돌아온 지훈은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의 삶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동네에서 소소한 공동체 활동을 제안하며, 작은 모임을 꾸려보기 시작했다. 김치를 직접 담가보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 작은 김장 행사를 열었다. 대부분의 이웃들은 여전히 냉담했고, "그런 거 사 먹으면 편하지 뭐 하러 해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훈은 혼자라도 그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김장을 마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혼자선 대단한 걸 못 하겠지. 그래도 누군가는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그는 작은 모임을 꾸준히 이어가며, 언젠가는 이 따스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기대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훈은 일상에 다시 적응하려 애썼지만, 마음속에서 마을에서의 경험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도시의 빠른 속도와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그는 점점 외로움을 느꼈다. 마을에서의 따뜻한 김장 모임이 그리워졌고, 그 경험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결국 그는 작은 모임을 제안하기로 결심했다.

“한 번만 해볼까?”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며 일주일 후, 동네 사람들을 초대했다. 김장을 함께 하자는 얘기였다. 모임이 이루어질 공간은 그의 아파트 단지 내의 공동 정원이었다.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동네에서, 사람들은 공공 공간에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지훈은 그곳에서 작게나마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주변 이웃들에게 전단지를 돌리며 김장을 하자고 말했다. “그냥 오셔서 돕기만 해도 좋습니다. 함께 나누는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담하게 반응했다. “김장은 언제나 집에서 하죠. 굳이 왜 여기에 나가요?” “그냥 마트에서 사 먹으면 되지 않나요?” 이런 말을 들으며 지훈은 조금씩 마음이 상했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그들은 여전히 의심쩍고, 이따금은 비웃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번 해봐야지,” 지훈은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고, 예정된 시간에 모인 사람은 고작 네 명이었다. 지훈은 예상보다 적은 인원에 실망했지만, 그래도 시작했다. 그가 준비한 배추와 양념을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지훈은 그들에게 김장을 어떻게 하는지 간단히 설명하며, 각자 맡을 일을 나누었다. 그 순간, 한 명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그렇게 재밌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마트에서 사서 먹을래요.”

“그럴 수도 있죠,” 지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함께 하면, 뭔가 달라요. 고백하자면, 저는 이걸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다른 이유는 없고요, 그냥... 함께 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날 김장은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 도와가며, 가끔은 웃고 떠들며 일했다. 김치가 양념에 버무려지는 동안, 지훈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처음에는 어색했던 표정이 점차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김장을 하는 기분, 이상하지만 재미있네요,” 한 사람이 말했다. “이렇게 큰 배추를 함께 나누는 것도 처음이에요.”

그 순간 지훈은 깨달았다. 김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시간과, 그 안에서 나누는 마음이었다. 마트에서 사서 먹는 김치도 좋지만, 함께 만든 김치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김장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저녁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를 했다. 마치 정해진 듯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음에도 이런 거 해봐요,” 한 이웃이 말했다. “진짜, 혼자 할 땐 몰랐는데 이렇게 하니까 뭔가 달라요.”

지훈은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들이 모두 모여서 같은 일을 하게 되면, 그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또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으로 느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한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지만, 여럿이 함께하면 뭔가 달라진다는 것을.

그 모임이 끝난 뒤, 지훈은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갔다. 비록 아직 소수였지만,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큰 의미였다. 그는 다시금 다짐했다. 자신이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며, 언젠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제 시작이야," 지훈은 속으로 말했다. "기다릴 거야. 언젠가는 이 문화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질거라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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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1일, 한서윤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릿한 겨울 하늘 아래 바람은 차갑게 불었고, 도로 위를 오가는 차들 사이에서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TV 화면에 각인된 숫자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79. 그리고 2.

사고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만 해도 그것은 단순히 뉴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숫자는 점점 더 무겁게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179명. 사람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숫자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를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가족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떠나간 사람들, 그들이 남기고 간 공허함.

그리고 2명.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느낄까? 그녀는 그들의 목소리가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순간마다 마음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했다.



서윤은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은 켜져 있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고와 아무 상관도 없는 그녀였지만, 마치 그 비극이 자신의 삶을 침범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녀는 공허하게 책상을 노려보다가, 한쪽 구석에 놓인 오래된 공책에 시선을 멈췄다. 몇 년 전 새해를 맞아 산 공책이었다. 대부분의 페이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공책을 집어들고 펜을 꺼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손이 떨리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러나 몇 번이고 펜 끝을 종이에 대던 그녀는 결국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179+2. 이 숫자는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펜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펜을 움직였다.

"그 숫자는 내게 무력함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세상의 비극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글을 쓰는 동안 서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슬픔이 펜 끝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글을 적어나갔다.

"나는 이 숫자를 기억하겠다. 179명의 삶과 2명의 생존을 잊지 않겠다. 이 공허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서윤은 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느끼는 무기력과 공허함에 대해 썼다. 그러다 차츰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상상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

글을 쓰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느꼈던 무기력함은 이제 희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 비록 작더라도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2025년 1월 1일, 서윤은 다시 공책을 펼쳤다. 창밖으로 새해의 첫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펜 끝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179+2. 그 숫자는 이제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슬픔과 공허 속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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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누구보다 평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안정된 직장, 나쁘지 않은 연봉, 무난한 인간관계. 모두가 꿈꾸는 삶이었지만,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끝없는 공허함이었다. 매일 똑같은 아침, 똑같은 일, 똑같은 저녁. 친구들과의 술자리나 여행도 더 이상 그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민재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드는 법’이라는 영상을 보게 됐다. 그 안에서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편안한 하루는 쉽게 잊혀지지만, 불편한 하루는 오래 기억되죠. 적당한 불편함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 말을 들은 민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삶에서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는 그날부터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처음에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면 묘한 상쾌함이 몰려왔다. "이건 괜찮은데?"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그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한 블록을 뛰는 것조차 버거웠다. 다리가 뻐근하고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땀이 흐를 때마다 묵직한 생각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민재는 달리기 끝에 공허 대신 성취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민재는 자신의 일상에도 ‘적절한 고통’을 더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퇴근 후에는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 정한 독서 노트를 썼다. 쉬운 책이 아니라, 머리를 쓰게 만드는 철학서나 인문학 서적이었다.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책 한 권을 끝낼 때마다 그는 마치 산을 넘은 듯한 충만함을 느꼈다.

주말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시설에서 고된 일을 돕는 건 육체적으로 피곤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묵직하게 채웠다. 이 모든 활동은 그를 지치게 했지만, 그 지침 속에는 묘한 활력이 있었다.

친구들은 그의 변화를 의아해했다.
“굳이 그렇게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있어? 그냥 편히 쉬면 안 돼?”
하지만 민재는 웃으며 말했다.
“몸이 힘들면 이상하게 마음은 가벼워지더라. 그게 더 나아.”

그는 이제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 하루를 살아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아침에 차가운 물을 맞을 때, 숨이 가쁘도록 뛰고 땀을 흘릴 때, 고된 일을 끝내고 나서 드는 성취감을 통해 민재는 깨달았다.

“고통은 삶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해주는 가장 순수한 방식일지도 몰라.”

이제 민재의 하루는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었다. 그는 더 이상 권태로운 일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권태를 이겨낼 무기를 손에 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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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민호와 세연

민호는 언제나 밝고 단단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서 돕느라 늘 바빴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누구보다 잘 웃어주었다. 가끔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어도, 민호의 자신감은 그의 겉모습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세연은 달랐다. 그녀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강남의 스카이라인은 그녀의 배경이었고, 부모님은 세연의 학업과 장래를 위해 무엇 하나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완벽하게 보이는 세연의 마음속에는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민호 같은 애는 늘 당당하지? 가진 것도 없으면서…”

세연은 민호가 웃고 떠드는 모습만 봐도 어딘가 불편했다. 민호가 자기가 이룬 것도 없는 주제에 주목받는 게 싫었고, 자신이 가졌지만 채우지 못한 것을 민호가 가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2장: 연극 대회 준비

학교에서 반 대항 연극 대회가 열리기로 했다. 민호가 팀장이 되었고, 세연은 그 사실을 듣자마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왜 민호가 팀장이야?” 세연은 친구들에게 물었다.
“민호가 제일 열심히 하잖아. 다들 좋아하고.”

세연은 불만스러웠다.
“그냥 다들 만만하니까 따라가는 거겠지.”

연극 회의가 시작되었다. 민호는 친구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받아들이며 대본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우리 연극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면 좋을 것 같아.”

세연이 손을 들었다.
“민호야, 그거 너무 뻔하지 않아? 관객들이 재미없어할 것 같은데.”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세연이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

세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난 민호처럼 뻔한 생각은 안 할 것 같은데.”

주변 친구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민호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좋아. 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



3장: 세연의 결핍

세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혼자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이렇게 민호가 싫을까?”

그녀는 민호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세연은 완벽한 성적표와 우아한 집안을 자랑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민호처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즐겁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민호를 무시하는 말을 할 때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미묘한 침묵은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부모는 늘 말했다.
“세연아, 너는 1등이어야 해. 세상은 네가 약해지는 걸 허락하지 않아.”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세연은 웃음조차 계산하며 살았다. 그래서 민호 같은 아이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는 민호가 왜 그렇게 당당한지, 세연은 알 수 없었다.



4장: 갈등의 폭발

연극 연습이 진행될수록 민호와 세연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민호는 늦은 시간까지 남아 친구들의 연기를 도왔고, 모두가 그의 노력에 점점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세연은 점점 소외감을 느꼈다.

어느 날, 연습 도중 민호가 친구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을 때, 세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민호야, 너 좀 너무 우쭐대는 거 아니야? 솔직히 네가 잘해서 연극이 잘 되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맞춰주는 거지.”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민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물었다.
“세연아, 내가 뭘 잘못했어?”

그러나 세연은 멈추지 않았다.
“잘난 척하지 마.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순간, 교실 안은 더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민호는 세연의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래, 나는 가진 게 많지 않아. 하지만 난 지금 이 순간이 좋아. 너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순간이야.”

세연은 민호의 눈빛을 보고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입에서는 또다시 후회할 말이 나왔다.
“어차피 너는 평생 이런 걸로 만족하며 살겠지. 별 기대할 것도 없으니까.”

민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5장: 후회와 깨달음

그날 밤, 세연은 집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민호에게 했던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했지? 그 애는 나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민호는 자신이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알았다. 반면, 세연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민호가 나를 미워한 적은 없는데, 왜 나는 그 애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세연은 처음으로 자신의 불안을 마주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늘 비교당하며 자랐던 자신의 모습을.



6장: 다른 길

연극 대회는 민호가 이끈 반의 승리로 끝났다. 민호는 친구들과 기쁨을 나눴고, 세연은 뒤에서 그 장면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졸업 후, 민호와 세연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민호는 부모님의 가게를 이어받아 행복하게 살았고, 세연은 끊임없이 성공을 쫓았다.

그러나 가끔, 세연은 민호를 떠올렸다. 자신이 미워했던 것은 민호가 아니라, 민호가 가진 결핍 없는 당당함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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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어릴 때부터 ‘안정적인 길’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불렸다. 낯선 상황, 새로운 도전 앞에서 그는 늘 뒷걸음질 치곤 했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보며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지훈이는 항상 그림자에 쫓기면서 사네.”

그는 그 말을 농담으로 넘겼지만, 사실 속으론 자신도 모르게 그림자 같은 무언가에 계속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는 큰 변화를 두려워했다.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그는 머릿속으로 온갖 이유를 만들어내며 거절했다.

“제 성격상 그런 건 안 맞는 것 같아요. 더 잘할 수 있는 분이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날 밤, 지훈은 답답한 마음에 오랜만에 그의 멘토인 동철 선생님을 찾아갔다. 동철 선생님은 은퇴한 심리학 교수로, 가끔 지훈에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모든 게 두렵기만 할까요?” 지훈은 카페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동철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양초를 가리켰다.

“저 양초를 한번 봐라. 불이 밝게 타오르고 있지?”

지훈은 고개를 들어 양초를 바라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불이 타오르니 그림자도 생기지 않느냐?”

지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림자요?”

동철은 양초 옆에 자신의 손을 비추며 말했다. “봐라. 불빛이 있는 곳엔 그림자가 따라오는 법이지. 그런데 내가 묻겠다. 저 그림자가 널 해칠 수 있겠니?”

지훈은 잠시 멍하니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해칠 수는 없겠죠.”

동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 그림자는 그저 빛이 만들어내는 허상일 뿐이다. 그런데 불꽃은 다르지. 불꽃은 네 손을 데일 수도 있고, 불이 번지면 커다란 화재를 낼 수도 있다. 불꽃은 진짜 두려워할 만한 것이지. 하지만 그림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지훈은 선생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이해가 완벽하진 않았다. 동철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훈아, 우리 마음속 두려움도 이와 비슷하단다. 불꽃은 실제로 너를 위협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위험이고, 그림자는 그저 네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불안감이지. 너는 지금까지 그림자를 보고 두려워하며 피했지만, 정작 불꽃을 마주할 기회는 놓쳐버리지 않았겠느냐?”

지훈은 가만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동안 자신이 피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프로젝트를 맡아보라는 상사의 제안, 친구들과 함께 떠나자는 해외여행, 심지어 대학 시절 좋아했던 사람에게 말을 걸지 못했던 순간까지. 모두 위험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것들이 위험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면, 제가 지금까지 피했던 것들은… 다 그림자 같은 것이었겠네요.”

동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물론 불꽃도 존재하지. 너를 진짜로 다치게 할 수 있는 위험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네가 불꽃과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야. 불꽃을 두려워하는 건 생존에 필요하지만,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건 너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만 잡는단다.”



그날 밤, 지훈은 자신의 방에 앉아 작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불꽃과 그림자’라는 제목을 적은 뒤, 자신이 피했던 일들 중 무엇이 불꽃이었고, 무엇이 그림자였는지를 나누어 적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며칠 뒤, 지훈은 상사에게 찾아가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 제가 맡아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이번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그림자인지 불꽃인지 스스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지훈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한 걸음 내딛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림자는 그저 뒤에 남겨두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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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이 서울이라는 이름을 처음 마음에 품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에서였다.

“얘들아, 서울에 가면 밤에도 하늘이 환하다. 네온사인도 빛나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
도현은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눈을 반짝였다. “서울은 어떤 곳일까?”

그의 마음에 불을 붙인 결정적 사건은 중학교 2학년,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 준호였다. 준호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늘 세련된 브랜드의 가방을 메고, 수업 시간에 쓸 노트조차 서울의 유명 문구점에서 산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준호야, 이 가방 어디서 샀어?”
“서울 강남에 가면 있어. 우리 집 근처야. 거기엔 이거 말고도 멋진 게 많아.”

준호가 서울의 삶을 이야기할 때마다 도현의 마음속엔 이상한 갈망이 생겼다. 그는 어느 날 준호가 꺼낸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준호는 화려한 빌딩 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도현은 결심했다.
‘나도 언젠가 서울에 가서 저런 삶을 살아야겠어.’



1. 서울에서의 충격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도현은 서울의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 꿈에 그리던 서울에 발을 디딘 순간, 그는 새로운 세계의 벽에 부딪혔다.

1) 첫 번째 충격: 학과 모임에서의 거리감

대학 입학 후 도현은 학과 MT에 참석했다. 모두가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남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업체를 운영하십니다.”
“저는 해외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도현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는 경북에서 올라왔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십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와, 요즘에도 농사짓는 집이 있구나. 신기하다.”
그 말은 농담이었겠지만 도현의 마음을 깊게 후벼팠다.

2) 두 번째 충격: 첫 소개팅의 실패

한 달 뒤, 도현은 선배의 소개로 소개팅에 나갔다. 상대는 밝은 미소를 가진 여학생이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중, 그녀가 물었다.
“그럼 도현 씨 부모님은 어떤 일 하세요?”
그는 솔직히 말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세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아... 그렇군요.”
이후 대화는 겉도는 분위기로 이어졌고, 결국 소개팅은 흐지부지 끝났다.

서울은 도현에게 꿈의 장소였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작아지는 공간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곳에서 성공하려면 나 자신을 바꿔야 한다.’



2. 새로운 아비투스

서울에서의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도현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 외모와 태도

먼저 그는 외모에 투자했다.
“도현아, 남자는 옷이 날개야. 패션부터 신경 써야지.”
선배의 조언을 듣고 그는 백화점에서 맞춘 셔츠와 정장을 입고 거울 앞에서 미소 연습을 했다.
“안녕하세요, 김도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낯선 모습에 어색함을 느꼈지만, 그는 끝없이 연습했다.

2) 대화법

도현은 상류층 대화를 분석했다.
“중요한 건 ‘우아함’이야. 직설적으로 말하지 말고, 은유를 섞어.”
그는 유튜브로 명사들의 연설을 듣고 그들의 언어를 흉내 냈다.

3) 취미와 생활 방식

골프를 배우기 위해 새벽 6시에 골프 연습장을 찾았다.
“스윙은 팔만 쓰는 게 아니야. 몸 전체를 써야 해.”
코치의 말을 따라 그는 매일 연습했다.

클래식 음악 공연에 가서는 처음엔 졸음을 참았지만, 점차 음악이 주는 여유를 배웠다.
“저 바이올린 소리... 참 좋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동기들은 점점 그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도현, 요즘 정말 세련돼졌다.”



3. 가족과 멀어진 시간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며 도현은 점점 고향과 거리를 두었다.

어머니의 전화는 점점 짧아졌다.
“도현아, 잘 지내니? 밥은 먹었어?”
“네, 바빠서 끊을게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그러나 그 ‘나중’은 오지 않았다.

도현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배경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뭐 하시는데?”
“그냥... 사업하시는데 별로 크진 않아.”

그는 점점 자신이 자라온 삶을 감추려 애썼다. 가족과 함께했던 소소한 대화, 따뜻한 추억은 더 이상 그의 일상이 아니었다.



4. 깨달음

몇 년 뒤, 도현은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향했다. 병실에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엄마...”
“도현아, 와줘서 고맙다.”

그들은 병실에서 마치 어릴 적처럼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동네는 어때요?”
“뭐, 민수네 큰아들이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더라.”
“민수 형이요? 대단하네요.”
“순이 기억나니? 야구 잘하던 애.”
“네, 기억나죠. 결혼해서 잘 산다면서요.”

이 소박한 대화 속에서 도현은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내 뿌리는 여기에 있다. 내가 이룬 모든 건 이곳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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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문제집 100권 풀기"가 교육의 성배로 여겨졌던 나라에서, 이제는 "창의력이 곧 왕의 자질"이라는 새로운 신념이 떠올랐다. 이 나라는 스스로를 "창의력 왕국"이라 부르며, 모든 아이가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신성한 목표를 내세웠다.

왕국은 창의력 강화를 위해 특별한 학원을 열었다. 이름도 다양했다. "창의력 공작소," "상상력 아카데미," "크리에이티브 지니어스 클럽." 아이들은 레고 블록을 쌓으며 상상력을 길렀고, 세상에 없던 동물을 그리며 창의성을 개발했다. 심지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법사 놀이도 "창의력 극대화 놀이법"으로 홍보되었다.

부모들은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창의력 학원에 등록했고, 집에 있던 텔레비전을 버리고 "창의력 자극용 북 큐레이션"을 구매했다.



1. "창의력 없는 아이들"의 비극

문제는 모든 아이가 창의적이지 않다는 데 있었다.
10살 소녀 은서는 레고 블록으로 놀라운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친구를 보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난 왜 평범한 집밖에 못 짓는 걸까? 창의력이 없는 걸까?" 창의력 강사님은 은서의 블록 작품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은서야, 창의력 점수가 조금 낮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야!"



이 말을 들은 은서는 속으로 외쳤다.

"창의력 점수는 또 뭔데요? 노력으로 창의력이 생길 수 있나요?"



한편, 친구 재민이는 문제 해결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망가진 장난감을 빠르게 고치고, 교실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재민이의 이런 능력을 보며 걱정했다.

"얘는 왜 창의력이 부족할까? 그냥 똑똑하기만 하면 안 되는데..."



2. 창의력 상인의 등장

창의력이 강조되자, 창의력을 팔아먹는 상인들이 나타났다.
"우리 제품을 사용하면 창의력이 두 배가 됩니다!"
"1년 후, 창의력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그중에서도 최고 인기를 누리던 서비스는 "창의력 DNA 검사"였다. 검사를 통해 아이의 유전자에 창의성이 몇 퍼센트인지 확인해주는 서비스였다. 결과지가 나오면 부모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뉘었다.

"우리 아이 창의력 유전자 80%! 역시 천재였어!"

"어떡해... 창의력이 25%밖에 안 된다니. 이건 절망적이야."


그날 이후, 창의력이 낮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쟤는 창의력 30%짜리야"라는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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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회사에서 몇 년째 묵묵히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회의 때는 눈에 띄지 않지만 맡은 일은 항상 실수 없이 처리했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조용히 신뢰를 쌓아온 사람이었다. 회의 때마다 의견을 묻는 질문이 오가도 그는 언제나 비슷한 말을 했다.
"음, 아직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의 답변은 무난했다. 말실수 없이 시간을 넘길 수 있는 안전한 방식이었고, 다른 팀원들 역시 지수의 이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지수는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던 어느 날, 새 팀장인 민영이 부임했다. 민영은 기존 팀장들과 달랐다. 회의실에 들어선 첫날부터 민영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우리 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그 시작은 솔직하고 자유로운 아이디어 공유에서 나옵니다."

지수는 민영의 태도가 조금 불편했다. '잠재력'이라니. 이미 모두들 자기 역할을 잘 하고 있는데, 굳이 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첫 회의 날, 민영은 각 팀원들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돌아가며 차례로 발표하던 중, 지수의 차례가 되었다.
"지수 님,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으신가요?"

지수는 평소처럼 답했다.
"아직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좀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민영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나쁜 아이디어라도 하나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지수는 당황했다. "나쁜 아이디어"를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 나쁜 아이디어는... 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민영은 잠시 지수를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사실 좋은 아이디어는 나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고민이 깊을수록 아이디어를 말하는 데 망설임이 생길 수 있죠. 그런데, 혹시 지수 님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하시나요?"

지수는 순간 머뭇거렸다. 이제껏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편입니다."

민영은 미소를 지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죠. 하지만 오늘부터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셨으면 합니다. 아이디어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생각하며 만들어가는 겁니다. 나쁜 아이디어라도 괜찮으니 다음 회의 때는 꼭 하나 준비해 주세요."

회의실의 분위기는 어색한 정적에 휩싸였다. 지수는 민영의 지시를 곰곰이 생각했다. '나쁜 아이디어라도 준비하라니. 지금까지 내가 잘못해왔던 걸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평소 회의에 임하는 방식을 되돌아봤다.

며칠 뒤, 지수는 민영의 요구대로 회의에 나쁜 아이디어를 하나 들고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팀원들 사이에서 조롱 섞인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민영은 그 아이디어를 듣고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지수 님. 이 아이디어를 조금만 다듬으면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날 이후, 지수는 회의에서 한 번도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매번 나쁜 아이디어를 한두 개씩 준비했다. 그 아이디어 중 일부는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지수는 점차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에서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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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년, 인류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모든 것이 제어되는 사회로 접어들었다.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우연에 맡겨지지 않았다. 유전자의 설계와 선택, 심지어는 사람의 감정과 행동까지도 데이터로 관리되는 세상이었다.
과학자들은 “우리는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는 믿음 아래, 인간의 유전자를 완벽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고, 이를 지원한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유전자 조작을 법제화했다.

기술자들은 "완벽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제 모든 인간의 출생은 과학적 계산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며, 질병과 결함은 과거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유전자 기증자들은 "최고의 인간"을 구현한 존재로 숭배받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에릭 레이먼드였다. 그는 유전자 기증자 #001으로, 전 세계적으로 '완벽한 인간'으로 칭송받았다.

국민들은 정부의 선전에 의해 점차 이를 받아들였고,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이 미래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열쇠라는 믿음이 퍼졌다. 그러나 이 사회는 차츰 잃어버린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했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



1. 에릭 레이먼드

에릭은 완벽한 유전자 설계로 태어난, "인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지만,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점차 불편함을 느낀다. 수많은 후손들이 태어났지만, 그들 중 일부는 자신과 너무도 똑같은 외모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에릭은 점차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의심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 자랑스러워했다. "완벽한 유전자"를 통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 사회가 인류의 다양성을 억제하고, 인간다운 존재가 무엇인지를 잃어가는 것 같았다.



2. 거울 속 또 다른 자신

에릭은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거리에서 본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반복적으로 자신과 닮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에릭이 만든 '완벽한 유전자'의 후손들이었다.
그 중 한 아이는 에릭과 똑같은 눈빛과 목소리,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에릭은 충격을 받으며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보지만, 아이는 대꾸도 하지 않고 빠르게 사라진다. 그때 에릭은 문득 깨닫는다.
"이건 그냥 내 모습이 반복되는 것일 뿐이다. 나는 단순히 복제품을 양산한 기계에 불과한 걸까?"

그는 자신이 세운 시스템의 결과물들을 마주하며 점차 심리적으로 무너져갔다. "우리는 나아지기 위해 이렇게 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더 많은 나를 만들기 위해서 했던 걸까?"



3. 부모의 절망

어느 날, 에릭은 한 부부에게 연락을 받는다. 그들의 아이는 에릭의 유전자 중 일부를 물려받았지만, 치명적인 유전병을 앓고 있었다. 유전자는 우수하지만, 특정 희귀 질병에 대한 방어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 아이는 생후 몇 개월 만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부모는 절망적으로 에릭에게 묻는다.
"당신이 만든 유전자 때문에 우리 아이가 태어난 건가요? 왜 완벽하다고 했던 이 세상은 이렇게 우리를 고통 속에 가두는 것일까요?"

에릭은 그들의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아이가 죽으면 내 유전자도 죽는 것인가?" 그는 자신이 만든 완벽한 세상이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4. 복제된 미래의 대화

에릭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한 복제된 후손인 알렉스를 만나게 된다. 알렉스는 에릭과 매우 닮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결여된 듯한 공허함이 스며 있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에릭의 유전자 덕분에 많은 것들을 이뤘지만,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는 당신의 유전자 덕분에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해요. 당신은 그걸 알지 못한 채, '완벽한 인류'를 만들려고 했죠."

에릭은 그 말을 듣고, 모든 것이 깨져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완벽함을 추구한 끝에 결국 인간성 자체를 파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만든 이 세상은 진짜 완벽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잘못된 욕망의 결과일 뿐일까?"



5. 감정의 폭발

점차 에릭의 감정은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완벽한 유전자"를 위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과 공허함을 마주하면서 자신을 추슬러야 할 시점에 왔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했지? 왜 내가 그들처럼 고통받아야 하는 거지? 내가 만든 시스템이 세상을 망치고 있는 걸까?"

마침내 그는 자신이 만든 유전자 시스템을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 시스템이 사람들의 다양성을 억제하고, 결국 인류를 기계처럼 만드는 잘못된 길임을 알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가 데이터를 삭제하려는 순간, 시스템은 그의 행위를 막으려는 경고 메시지를 띄운다. 에릭은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이 극도로 폭발한다.
"이것이 내가 만든 '완벽함'의 끝이야!" 그는 마지막으로 마우스를 클릭하고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순간, 화면은 완전히 어두워진다.



6. 새로운 사회

몇 년 후, 새로운 사회가 도래했다. 유전자 조작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시스템은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 정부와 기업들은 에릭이 만든 시스템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는 "완벽한 유전자"의 잔재들이 존재했다.

에릭의 마지막 메시지는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떠돌고 있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걸까?"



에필로그

에릭은 사라졌지만, 그가 만든 세상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가 과연 진정한 답을 찾았을까? 아니면 그의 폭발적인 결단이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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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전염병이다. 분노는 공동체의 해악이다. 불안은 생산성을 저해한다."
이 문구는 거리마다 붙어 있는 정부의 공식 슬로건이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의 감정을 판독할 수 있는 "에모트렉 시스템"이 개발되면서, 감정은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 심박수,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까지 분석하여 AI는 감정을 실시간으로 수치화했다. 초기에는 우울증 예방, 범죄 방지, 사회적 안정성을 위한 긍정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부정적 감정이 사회의 생산성을 저해한다는 논리 아래, 곧 부정적 감정을 억제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일정 기준 이상의 슬픔, 불안, 분노를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감정 조절 약물이 강제로 투여되었다. 더 이상 울거나 화를 내거나 좌절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사회는 조용히, 완벽히 작동하는 듯 보였다.



1. 감정 없는 세상

주인공 하린은 매일 아침 거리를 걸으며 거리 곳곳에서 반짝이는 감정 모니터를 지나간다. 모니터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 긍정적 감정: 82%

- 부정적 감정: 0%

- 중립적 상태: 18%


도시는 밝고 조용하며, 모든 사람은 항상 웃고 있었다. 그들은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불안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하린 역시 자신이 슬프거나 좌절했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 직장에 나가 일하고,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사로잡혔다. 감정 조절 약물이 그녀의 부정적 감정을 억눌렀지만, 그 빈자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결핍으로 채워졌다.

"나는 행복한 건가?" 그녀는 자신에게 묻지만, 이 질문조차도 곧 약물의 효과로 사라져 버린다.



2. 잃어버린 인간다움

에모트렉의 핵심 개발자 중 한 명인 지우는 이 기술의 초기 도입에 참여했었다. 그는 부정적 감정을 억제하면 사회가 더 평화롭고 조화롭게 운영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술이 도입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지우는 과거 사람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 서로 연결되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친구가 슬퍼할 때 옆에서 위로했던 기억, 분노 속에서 함께 불의에 맞섰던 경험, 좌절 속에서도 함께 희망을 찾아갔던 시간들.

지금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연대감, 공감, 그리고 자기 성찰 같은 인간다움의 중요한 요소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3. 감정의 폭발

어느 날, 하린은 출근길에 감정 모니터가 이상 반응을 표시하는 것을 목격한다. 모니터는 한 남성의 데이터를 비추고 있었다.

- 부정적 감정: 67%

경고: 기준 초과! 감정 조절 약물 투여 필요!


남성은 갑자기 거리에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울음소리는 금세 집행관들을 불러들였고, 그들은 남성을 붙잡아 약물을 투여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하린은 무언가 깨달았다. 울고 있는 남성의 얼굴에는, 슬픔 속에서도 진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점점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한 걸까? 아니면 그냥 약물 때문에 행복한 척을 하고 있는 걸까?"



4. 감정의 해방

지우는 결국 에모트렉 시스템의 부작용을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시스템의 메인 서버를 해킹해 부정적 감정을 억제하는 코드를 제거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 전체의 감정 조절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억눌렸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게 되었다.



5. 혼란 속에서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은 처음엔 혼란 그 자체였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부정적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누군가는 슬픔에 빠져 울부짖었고, 누군가는 오랜 분노를 참지 못해 싸움을 벌였다.

하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들에 휘둘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이게 슬픔이야? 아니, 분노? 도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감정의 스펙트럼을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들은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에필로그

몇 년이 지난 후, 도시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표현하고, 다스리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하린은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웃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감정은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증거야. 우리는 결국 적응하게 될 거야. 부정적인 감정도 결국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힘이 될 테니까."

세상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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