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에 산 지 5년째였다.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를 타며 마주치는 이웃들과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그저 손을 뻗어 문 닫힘 버튼을 눌렀다. “바빠서 그랬다”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도, 사실 그는 이웃과 어떤 교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관계를 맺는 순간, 거기서 비롯될지도 모르는 의무와 불편함이 싫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의 과중한 업무와 인간관계에 지친 지훈은 결국 병가를 내고 휴직을 결정했다. 상사의 권유로 그는 오랜만에 고향 근처 시골마을에 사는 정애 할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휴대전화 알람 대신 새소리와 함께 깨어날 수 있는 몇 주간의 휴식이라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시골로 내려간 첫날, 정애 할머니는 환한 미소로 지훈을 맞았다. “얼굴이 반쪽이네, 우리 지훈이. 쉬러 온 건 참 잘한 일이다.” 하지만 마을은 그가 익숙한 도시와는 너무도 달랐다.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 집에 찾아와 자신을 소개하며 다가왔다. “서울서 온 친척분이라면서요? 어서 와요.” 지훈은 당황했다. 이곳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했고, 그들에게 관심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며칠 후, 정애 할머니는 김장철이니 돕자고 했다. 지훈은 탐탁지 않았다. “마트에서 사 먹으면 되지 않아요? 굳이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해요?” 정애 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김장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해야 맛도 나고 정이 들지. 그런 건 마트에선 못 사.”
김장날이 되자, 지훈은 억지로 따라 나섰다. 절임 배추를 나르고 양념을 버무리는 일은 그의 체력과 인내심을 금세 소진시켰다. 실수도 잦았다. 배추를 나르다 그만 양념통을 엎질렀을 때, 그는 얼어붙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나무랄까 두려웠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한 어르신이 웃으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처음부터 잘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정애 할머니도 “다음엔 더 잘하겠지. 걱정 마라.”라며 등을 두드렸다.
그날 저녁, 지훈은 김장을 마친 후 마을 사람들과 갓 담근 김치에 수육을 곁들여 먹었다. 사람들은 서로 웃으며 고된 하루를 나눴고, 지훈도 덩달아 웃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함이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이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웠다.
며칠 후, 한 마을 주민이 갑작스런 병원 방문으로 김장을 끝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훈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돕겠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진심을 다해 도왔다. 도움을 받은 주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런 일, 도시 사람들은 안 한다던데.”
도시로 돌아온 지훈은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의 삶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동네에서 소소한 공동체 활동을 제안하며, 작은 모임을 꾸려보기 시작했다. 김치를 직접 담가보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 작은 김장 행사를 열었다. 대부분의 이웃들은 여전히 냉담했고, "그런 거 사 먹으면 편하지 뭐 하러 해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훈은 혼자라도 그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김장을 마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혼자선 대단한 걸 못 하겠지. 그래도 누군가는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그는 작은 모임을 꾸준히 이어가며, 언젠가는 이 따스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기대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훈은 일상에 다시 적응하려 애썼지만, 마음속에서 마을에서의 경험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도시의 빠른 속도와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그는 점점 외로움을 느꼈다. 마을에서의 따뜻한 김장 모임이 그리워졌고, 그 경험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결국 그는 작은 모임을 제안하기로 결심했다.
“한 번만 해볼까?”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며 일주일 후, 동네 사람들을 초대했다. 김장을 함께 하자는 얘기였다. 모임이 이루어질 공간은 그의 아파트 단지 내의 공동 정원이었다.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동네에서, 사람들은 공공 공간에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지훈은 그곳에서 작게나마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주변 이웃들에게 전단지를 돌리며 김장을 하자고 말했다. “그냥 오셔서 돕기만 해도 좋습니다. 함께 나누는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담하게 반응했다. “김장은 언제나 집에서 하죠. 굳이 왜 여기에 나가요?” “그냥 마트에서 사 먹으면 되지 않나요?” 이런 말을 들으며 지훈은 조금씩 마음이 상했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그들은 여전히 의심쩍고, 이따금은 비웃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번 해봐야지,” 지훈은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고, 예정된 시간에 모인 사람은 고작 네 명이었다. 지훈은 예상보다 적은 인원에 실망했지만, 그래도 시작했다. 그가 준비한 배추와 양념을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지훈은 그들에게 김장을 어떻게 하는지 간단히 설명하며, 각자 맡을 일을 나누었다. 그 순간, 한 명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그렇게 재밌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마트에서 사서 먹을래요.”
“그럴 수도 있죠,” 지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함께 하면, 뭔가 달라요. 고백하자면, 저는 이걸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다른 이유는 없고요, 그냥... 함께 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날 김장은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 도와가며, 가끔은 웃고 떠들며 일했다. 김치가 양념에 버무려지는 동안, 지훈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처음에는 어색했던 표정이 점차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김장을 하는 기분, 이상하지만 재미있네요,” 한 사람이 말했다. “이렇게 큰 배추를 함께 나누는 것도 처음이에요.”
그 순간 지훈은 깨달았다. 김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시간과, 그 안에서 나누는 마음이었다. 마트에서 사서 먹는 김치도 좋지만, 함께 만든 김치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김장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저녁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를 했다. 마치 정해진 듯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음에도 이런 거 해봐요,” 한 이웃이 말했다. “진짜, 혼자 할 땐 몰랐는데 이렇게 하니까 뭔가 달라요.”
지훈은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들이 모두 모여서 같은 일을 하게 되면, 그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또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으로 느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한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지만, 여럿이 함께하면 뭔가 달라진다는 것을.
그 모임이 끝난 뒤, 지훈은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갔다. 비록 아직 소수였지만,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큰 의미였다. 그는 다시금 다짐했다. 자신이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며, 언젠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제 시작이야," 지훈은 속으로 말했다. "기다릴 거야. 언젠가는 이 문화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질거라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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