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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5시 30분, 서준은 알람이 울리기 직전 눈을 떴다. 방 안은 조용했고, 희미한 새벽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를 정리했다. 이불의 주름을 꼼꼼히 펴고, 베개를 제자리에 두었다. 그 후 그는 주방으로 가 커피 머신 버튼을 눌렀다.

커피가 내려오는 동안 그는 싱크대 위에 남아 있던 물기를 천천히 닦았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로 가 앉아 밖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점점 밝아지는 하늘과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량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의 가지들. 서준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7시 정각, 그는 집을 나섰다. 길은 한산했고, 그는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공원을 지나며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색 잎사귀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서준이 도착한 곳은 도심의 작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은 아침 8시부터 문을 열었고, 서준은 문을 열기 전까지 책장을 정리하고 반납된 책들을 제자리에 꽂았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빠짐없이 책의 위치를 확인하며 작업을 마쳤다.

문을 연 후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왔지만, 서준은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책을 대출하거나 반납하려는 이용자들이 다가오면 그는 최소한의 말만 했다. "반납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출 기간은 2주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일정했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점심시간, 서준은 도서관 뒷마당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열고 조용히 식사를 했다. 그가 앉은 자리 근처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고양이는 서준을 힐끗 쳐다봤지만, 다가오지 않았다. 서준은 고양이를 보며 잠시 멈췄다가 다시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

오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에 들어왔고,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책을 정리하고 대출 업무를 처리했다. 저녁 6시가 되자 서준은 책상에 쌓인 서류를 정리하고 도서관 문을 닫았다.

퇴근길, 그는 근처 목욕탕에 들렀다. 옷을 벗고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며 그는 천장을 바라봤다. 김이 서린 천장이 보였다. 물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슈퍼마켓에 들러 간단한 재료들을 샀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만들고, 설거지를 끝낸 뒤 그는 책을 펼쳤다. 침대 옆 작은 스탠드 아래에서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은 방 안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책을 덮고 침대에 눕기 전, 서준은 거울 앞에 섰다. 그는 잠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다음 날, 서준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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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은 어린 시절부터 이상한 경험을 자주 했다. 그 경험은 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피곤할 때면 언제나 들리는 음악이 있었다. 그것은 보통 익숙하지 않은 밴드의 음악이었다. 어떤 곡들은 신나고, 어떤 곡들은 느리지만, 언제나 그 음악 속에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함께 들렸다. 그 함성은 마치 공연장에서 수백 명, 아니 그 이상이 몰려 있는 듯한 큰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을 때면, 마치 자신도 그 자리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속에서 스며드는 에너지와 감정은 매우 강렬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들리는 건 항상 극도로 피곤할 때였다. 정신이 흐릿해지고, 눈꺼풀이 무겁고, 마치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상태에서만 들리곤 했다.

그 음악을 처음 경험한 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피곤하게 집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상진은 그때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어차피 그건 누구나 피곤할 때 겪을 수 있는 환청일 테니까. 자신만의 상상이겠지, 하고 넘겨버렸다. 부모님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경험을 너무 자주 하게 되자 상진은 엄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나 가끔 되게 피곤할 때 이런 음악이 들려요. 사람들의 소리가 나는데, 공연장 같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 같아요."

엄마는 처음엔 웃으며 넘겼지만, 상진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자 그때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 "상진아, 그런 소리가 들리면 안 돼. 그건 좀 위험할 수 있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엄마는 그 말을 하며 상진의 이마에 손을 얹었고, 상진은 그것이 무언가 심각한 일이 될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그때부터 상진은 그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만 그런 거였으니까, 누구나 겪는 일일 테고, 그렇게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런 경험은 계속됐다. 어느 날, 피곤함에 지쳐있던 상진은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처음에는 듣는 듯하다가, 점차 그 표정이 어두워졌다. "야, 그건 좀 이상한데? 그거, 귀신 들린 거 아냐?" 친구는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지만, 상진은 그 순간 확실히 알았다. 사람들은 이런 걸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걸. 친구의 표정에서 불편함이 묻어났고, 상진은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만의 일이었고, 어쩌면 남들은 이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음악은 계속 들려왔다. 상진은 점점 피곤함 속에서 그 소리의 존재를 알아갔다. 그 음악은 정말로 마치 공연장의 라이브 공연처럼 강렬하고, 그 함성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가끔씩 그 음악이 너무 좋아서, 상진은 일부러 자신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보기도 했다. 마치 그 음악을 더 깊이 느끼고 싶은 듯이, 자신을 그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음악은 이제 상진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갔다. 그는 그 음악을 너무 좋아했다. 그 순간은 어쩌면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주었고, 그것이 주는 감동과 황홀감은 상진에게 큰 의미가 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진은 점점 현실의 무게에 눌려갔다. 나이가 들수록, 피곤함을 자주 느끼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 되었다. 공부, 일,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계속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더 이상 그 음악에 빠져드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상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선 그 음악을 멀리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 음악은 가끔씩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피곤한 하루 끝에 그 소리가 들릴 때면, 상진은 다시 한 번 그 세상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음악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상진은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점점 선명해지는 어떤 무언가를 느꼈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마치 실눈을 뜨고 먼 곳에서 봐야만 보이는 것처럼 그 그림은 흐려졌다. 그러나 점점 더 그 그림이 선명해졌다. 그 음악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들, 소리의 파동들이 점점 더 뚜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흩어진 실루엣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하나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 듯했다. 어느 순간, 그 모습이 완전히 선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때 상진은 깨달았다. 그 음악이, 그 함성 소리가 사실 다른 평행 우주에 있는 자신의 음악이었다는 것을. 그는 그 음악을 자신이 좋아했던 밴드 음악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가 다른 세계에서 이룬 꿈의 모습이었다. 그 소리 속의 함성은 다른 세계의 상진을 향한 응원과 축하의 소리였다. 그것은 단지 음악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응원이었다. 상진은 소름이 돋았다. 그럼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다른 세계의 자신처럼 무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가능할까?

상진은 그 순간 확신했다.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음악, 그가 동경했던 밴드의 라이브 공연, 그 모든 것이 사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그는 이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피곤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음악을 현실로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상진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악기를 다룰 줄 몰랐던 그는 처음엔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를 이끌었다. 그는 연습을 거듭하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무대가 다가왔다. 상진은 200명의 관객이 모인 작은 공연장에서 첫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그가 만든 음악을, 그가 열심히 연습해온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로 한 것이다. 공연 당일, 상진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무대에 올라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긴장감에 사지가 떨리고 입은 얼어붙었다. 하지만 단순히 긴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엄청난 황홀감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긴 것이다.

음악이 시작되자, 상진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 음악에 흠뻑 빠져들었고, 관객들도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 음악 속에 담긴 열정과 에너지는, 그의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자, 상진은 숨을 헐떡이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관객들은 함성과 하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상진은 그 박수 소리 속에서 자신이 정말로 이룬 것을 깨달았다.

그가 꿈꾸던 세계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환청 속에서만 그 음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었다. 그의 인생 제 2막이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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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다. 서울 한복판의 고층 아파트 단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부모님, 주말이면 가족들이 찾아가는 대형 쇼핑몰과 카페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 속에서 민수는 자라났지만, 그 안에는 이상한 허무감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답답한지 몰랐다. 학교에서 성적을 올리고, 대학에 합격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는 길은 너무도 명확했지만,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마치 스크립트에 박힌 배우처럼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더 큰 문제였다. 동기들과의 대화는 늘 비슷한 주제로 끝났다. 취업, 연애, 소비. 민수는 웃으면서도 스스로를 속이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말하는데, 왜 나는 다 틀렸다고 느낄까?”

그러던 어느 날, 민수는 밤늦게 도서관에 가다가 거리의 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구걸을 하는 노숙자였다. 하지만 그 사람의 눈빛에는 이상한 무언가가 있었다. 민수는 우연히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너는 살기 위해 사는 거지. 근데, 죽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냐?"



모순된 세상

그날 이후, 민수는 인터넷에서 그 남자가 했던 말의 의미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라면 접하지 않았을 사이트, 포럼, 채팅방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그곳에서는 다른 이들이 세상이 가진 모순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시스템이 인간의 본성을 말살시키고 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고통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한 영상에 도달했다. 이라크의 황량한 사막 한복판에서, 무기를 들고 걷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멀리 도시의 폐허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평화도 없고, 안전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진정한 삶이 있다. 우리는 고난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바로 그 고난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민수는 이상하게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건 단순히 안정적인 삶이 아니라, 고통과 위험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트릭스에서의 탈출

어느 날 밤, 그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신이 느끼는 공허감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저 웃어넘겼다.

“야, 넌 그냥 생각이 많아서 그래. 우리처럼 즐기면서 살면 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는 그날 집에 돌아와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왜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없을까?” 그러다 문득 책장에 꽂혀 있던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은 그의 대학 동기가 선물해준 <메트릭스의 철학>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는 메트릭스 속의 삶이 얼마나 완벽하면서도 인간성을 잃게 만드는지를 깨달았다. 행복과 안전을 약속받은 삶이야말로 가장 큰 감옥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메트릭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겠어.”



불확실한 선택

민수는 결국 자신을 억누르던 안정적인 삶을 버리기로 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모든 돈을 정리한 뒤 인터넷을 통해 접속했던 단체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엔 민수를 의심했지만, 그의 진지한 태도를 확인한 뒤 그를 받아들였다.

몇 주 후, 민수는 낯선 중동의 한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비행기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난 처음으로 내가 원한 선택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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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은 또 적당한 선을 지켰다. 손을 잡는 것도, 약간의 스킨십도 괜찮았지만, 그것보다 더 가까워지려는 기색이 보이면 그는 본능적으로 선을 그었다. 너무 가까워지면 결국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는 걸, 그는 어릴 때부터 여러 번 겪었다.

이번엔 혜린이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준혁이 조금 더 오래 옆에 두고 싶다고 느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적당한 대화, 적당한 만남, 적당한 거리.

그날도 평소처럼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별로 중요한 얘기 없이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혜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준혁아,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준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뭔데?"

"너... 항상 이렇게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는 거, 이유가 뭐야?" 혜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진지했다.

준혁은 순간 당황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물어봐. 그냥... 나한테 그게 편해서 그래."

"편해서?" 혜린은 준혁의 대답을 곱씹는 듯, 천천히 되물었다.

"응. 사람들이랑 너무 가까워지면 결국 상처받잖아. 그럴 바엔 적당히 선 지키는 게 더 낫지."

혜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게 너한테 진짜 행복한 거야? 아니면 그냥... 상처받기 싫어서 도망치는 거야?"

"행복이고 뭐고, 그냥 내가 사는 방식이야." 준혁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예상했던 대화 주제가 아니었다.

혜린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준혁아, 나 너 이해하려고 하는 거야. 근데 너 이렇게 자꾸 선 긋는 거, 솔직히 말하면 좀 답답해."

준혁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난 네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아. 그래서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 근데 네가 자꾸 거리를 두니까... 내가 너한테 다가가면 안 되는 사람처럼 느껴져."

"혜린, 내가 널 멀리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나는 이런 게 익숙해서 그래." 준혁은 마지못해 변명하듯 말했다.

혜린은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었다. "너, 고슴도치 이야기 알아?"

"갑자기 웬 고슴도치?"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게 있어. 고슴도치들이 추운 겨울에 서로 가까워지려고 하면 가시 때문에 다치잖아. 그래서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고."

"그러니까, 내가 딱 그 고슴도치라는 거지?" 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제로 고슴도치들은 더 가까워지면 가시를 눕힌대. 찌르지 않으려고." 혜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짜 가까워지면 다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안 다칠지를 배운다는 거야."

준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린의 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래도... 쉽지 않아. 난 그런 걸 잘 못해."

혜린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천천히 해보자는 거야. 나한테도 기회를 줘. 너를 더 알고, 더 가까워질 기회를."

준혁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한 걸음씩."

그날 이후, 준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혜린은 준혁이 쳐놓은 장벽을 무리해서 허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의 곁에서 꾸준히 기다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준혁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거리를 두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란 걸.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 가까워져도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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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나는 한때 쇠락한 항구 도시였다. 공장들이 떠나고 빈 건물만 늘어나던 그곳은, 어느새 첨단 기술과 창업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벨로나의 성공은 모두가 "기적"이라 불렀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답하곤 했다.

모든 것은 작은 계기로 시작됐다. 벨로나에 처음 자리를 잡은 건, 몇몇 소규모 스타트업들이었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창업자들은 임대료를 아끼기 위해 공용 사무실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프로젝트를 돕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공동체적 본능의 발현

벨로나의 특징은 경쟁보다는 협력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같은 공간을 나눠 썼던 사람들 사이에, 서로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문화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초기 벨로나에 자리 잡은 한 팀, '노바스페이스'는 클라우드 기반의 파일 공유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버 보안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는 서비스 출시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때 옆 팀에 있던 한 보안 전문가가 자신이 작업하던 프로젝트를 잠시 멈추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경쟁자가 아니라 이웃입니다. 이웃이 어려울 땐 돕는 게 맞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바스페이스의 창업자 리안은 이런 도움을 받은 뒤, 이를 보답하고자 자신의 클라우드 기술을 기반으로 다른 팀의 데이터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러한 상호 협력의 분위기는 점차 벨로나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알타 연합'의 탄생

이후 벨로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알타 연합’이라 불리는 인적 네트워크였다. 이는 특정한 조직이나 규칙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벨로나의 초창기 기업가들이 자연스럽게 만든 관계망이었다.

알타 연합은 단순한 협력 관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초기 스타트업들 간의 교류로 시작된 네트워크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공을 도왔고, 몇몇 창업자들은 회사를 성공적으로 매각하거나 상장한 후 다시 벨로나로 돌아와 다른 팀에 투자하거나 조언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초창기 벨로나의 한 기업이었던 ‘옵티맥스’는 물류 최적화 알고리즘을 개발하다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창업자들은 회사를 매각한 후, 자신들이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다시 벨로나로 돌아와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들을 지원했다. 벨로나의 여러 성공 사례들 뒤에는 이처럼 직접적인 도움과 멘토링을 제공한 ‘알타 연합’이 있었다.

알타 연합은 한 기업의 성공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철학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벨로나에서 성공한 기업들은 다시 신생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기술적 조언을 제공하면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처럼 성장했다.



기적의 비결

벨로나의 성공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러 언론과 연구 기관이 벨로나를 분석하며 “어떻게 이런 공동체적 정신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벨로나를 특별한 정책이나 시스템으로 만든 모델로 오해했지만, 정작 벨로나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단순히 우리가 가진 걸 나누는 게 즐거웠을 뿐이에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문화가 만들어졌죠.”

벨로나는 잃어버렸던 ‘공동체적 본능’이 여전히 사람들 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경쟁보다는 협력, 거래보다는 나눔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억지로 만들어질 수 없지만, 자유롭게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음을 벨로나는 증명했다.

알타 연합의 창업자 중 한 명이 한 말은, 벨로나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했다.
“벨로나에서의 성공은 우리 개인의 성취가 아닙니다. 모두가 서로의 성공을 위한 조각을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그리고 그 과정이 무엇보다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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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질문은 낯설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도덕적이라 믿는 사람도, 폭력을 혐오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말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대부분 이렇게 덧붙여진다.
“물론,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야.”

나는 이 질문을 내 친구에게 던졌다.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요즘 어때?”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물었다. 카페에 앉은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났다. 그는 여전히 변호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친 얼굴이 모든 걸 말해줬다.

“뭐, 늘 그렇지. 사람들 요구는 끝이 없고, 클라이언트는 나를 의심하고.”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가끔은… 그냥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내 물음에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한두 번은 아니야. 근데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나? 현실에서 그런 걸 실행할 사람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일까?



며칠 후, 그의 이름이 인터넷에 떠올랐다.

“XX 변호사, 클라이언트와 불륜 의혹”
“XX, 과거 비리로 경찰 조사 받는다”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를 이야기들이 소문처럼 퍼졌다. 처음에는 댓글 몇 개뿐이었지만, 곧 수백 개, 수천 개의 비난으로 바뀌었다.

“변호사라더니, 진짜 쓰레기였네.”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구나.”
“정의는 살아 있다. 이런 인간은 망해야지.”

나는 그의 집을 찾았다. 초췌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그는 마치 무너져가는 성처럼 보였다. 술병이 테이블 위에 널려 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힘없이 웃었다.

“재미있지 않아?”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뭘 했는지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도 이렇게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잖아. 정의를 외치면서.”

나는 침묵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정말로 뭘 잘못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적어도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의 편에 있다고 믿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휘둘러. 그게 날 찌르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정의를 믿지만, 그 정의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비난은, 스스로를 선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옳은 세상을 만드는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행동은 결국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산산조각 내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칼이 가장 위험한 법이지.”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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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는 서울 외곽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그는 문학을 사랑했고, 사람들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상상과 달랐다. 손님은 점점 줄어들었고, 동네는 재개발로 고급 주거단지로 변해갔다.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공세 속에서 그의 책방은 과거의 유물처럼 느껴졌다.

진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책방을 새롭게 꾸미거나, 다른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대신, 여전히 오래된 방식으로 운영했다. 아날로그 감성을 강조하며 손님들에게 직접 손으로 쓴 추천 글귀를 남기곤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손님은 계속 줄어들었고, 책방은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어느 날, 단골이었던 젊은 직장인 현수가 찾아왔다.
“사장님, 여기 정말 좋지만, 요즘 사람들은 전자책이나 온라인으로 책을 더 많이 사요. 혹시 온라인으로도 판매해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진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책은 직접 만지고, 냄새를 맡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읽어야 제맛이지.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야.”

현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 한 권을 사고 나갔다. 그날 이후로 현수마저 책방에 오지 않았다.



책방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던 어느 날, 진수는 10년 만에 대학 동기 모임에 나갔다. 과거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던 친구들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속으로는 자신이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다.

모임에서 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시를 쓰던 선배는 인기 유튜버가 되어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있었고, 출판사에서 일하던 친구는 온라인 서점 플랫폼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진수야, 너는 아직도 책방 운영하니?” 한 친구가 물었다.
“응, 똑같이 하고 있어. 그게 가장 책다운 방식이잖아.”
그러나 그의 말에 친구들은 미묘한 침묵을 흘렸다.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수야, 세상이 변하고 있어. 우리도 그 흐름 속에서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 네 방식도 좋지만, 그것만 고집하다 보면 놓치는 게 많아.”

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믿었지만, 친구들의 성공과 자신이 처한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모임에서 돌아온 진수는 책방으로 가던 길에 폐허가 된 옛 동네를 지났다. 그곳은 재개발로 사라진 오래된 건물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이 책방을 운영하며 고집했던 방식이 과거의 잔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책방에 홀로 앉아 오래된 책들을 바라봤다. 책방은 여전히 그에게 소중했지만, 그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결국 결심했다. 다음 날 그는 작은 카메라를 사서 자신의 책방에서 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손으로 쓴 글귀를 화면에 띄우고, 책의 매력을 직접 말로 전달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몇 달이 지나자 진수의 책방은 온라인에서 점점 더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영상은 진심이 느껴진다며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책방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진수는 깨달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자신도 그 안에서 변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변한다는 것이 자신의 본질을 잃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책을 사랑했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날 밤, 그는 강변을 걸으며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물살은 끊임없이 변했지만, 강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변화 속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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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영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그곳에서의 분위기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케팅 팀의 신입사원으로, 그는 항상 '효율성'과 '성과'라는 두 단어에 얽매여야 했다. 그 회사는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곳이었다. 성과가 좋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느끼며 수영은 점점 더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고객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건 숫자와 결과가 아니라, 진정성과 소통이라고 믿었다.

그의 상사인 정 차장은 그와 정반대였다. 차장은 항상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중시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성과를 강조했다.

"수영 씨, 이렇게 고객을 감동시키려고 애쓰면 시간이 너무 걸려요. 이러다 우리는 언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어요?"
차장은 몇 번이고 그에게 조언을 주었다. 수영은 차장의 방식이 너무 기계적이고 형식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회사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그는 고객과의 깊은 신뢰를 쌓는 것에 집중하며, 때로는 회사의 방침을 무시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일하려 했다. 그 방식이 결국 팀 내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수영 씨, 그런 방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어요. 계속 고집하면 결국 회사에 피해를 줄 수밖에 없어요."
상사인 차장의 말은 날카로웠다. 결국, 수영은 퇴사를 결심했다. 그는 그때만 해도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었다. 고객을 존중하는 일이 비효율적일지라도, 그것이 결국 더 큰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창업을 시작한 후,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수영은 고객의 진심을 담고자 했지만, 시장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리 '효율'과 '성과'가 중요시되는 곳이었다. 그는 몇 번의 실패를 겪고, 결국 그가 고수했던 방식이 시장의 현실과 맞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0년 후, 수영은 어느 중견기업의 마케팅 팀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경력이 늘어날수록, 그는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며 더욱 현실적인 접근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가 맡고 있는 팀에는 신입사원 지호가 들어왔다. 지호는 수영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고객과의 진정성 있는 관계를 강조하며, '성과'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중시했다.

"팀장님, 우리가 이 캠페인을 하는 이유는 단지 매출을 올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고객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서죠."
지호의 말은 수영에게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는 자신도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수영은 이미 그런 사고방식이 회사의 목표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지호 씨,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팀의 목표는 고객과의 관계를 맺는 것만이 아니라, 결국 결과로 이어져야 하잖아요. 효율성을 고려하면서도 그 진정성을 지켜야 해요."
수영은 지호에게 그런 말을 했지만, 지호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날 이후, 수영은 지호가 지나치게 '고객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성과를 무시하면서까지 고객의 감정에만 의존하려는 태도는 수영에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몇 달 후, 팀은 큰 프로젝트에서 실패를 겪었다. 마케팅 전략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회사는 큰 손해를 입었다. 그 결과, 지호는 자신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팀장님, 제가 잘못했어요. 고객의 진심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게 시장의 흐름과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호는 고백했다. 수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갈등을 떠올렸다.

"지호 씨,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죠. 진정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장의 흐름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요. 그때의 고집이 지금의 내가 만든 거지만, 때로는 그 고집이 나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어요."

지호는 수영의 말을 깊이 새기며, 자신도 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그는 고객의 마음을 이해하는 동시에,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수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과거의 자신과 지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고백했다.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을 수 있어. 인생은 언제나 그때의 선택들이 결국 나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고집을 고수하지 않았다. 과거의 실수를 통해 얻은 교훈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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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 인터뷰 프로그램의 촬영장.
30대 초반의 청년이 무대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제 막 글로벌 스타트업을 상장시키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선구자로 인정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 인터뷰어가 질문을 던졌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롤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계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청년, 정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중학생 때 아버지와의 대화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15년 전, 정우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저녁.

정우는 방에서 문제집을 풀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공부가 잘 되지 않아 짜증이 났다. 책상 위에는 몇 시간째 답을 못 찾은 수학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TV를 보던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왔다.

"정우야, 뭐 하고 있니?"
"공부해요. 근데 잘 안 풀려요."
아버지는 정우의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

정우는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어딘가 진지했다. 두 사람은 책상 옆에 놓인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정우야, 네가 나중에 커서 꿈이 생길 거야. 그때 아빠가 네가 하겠다는 일을 반대할 수도 있어."
"왜요?"
"아빠니까. 아들이 실패하거나 힘들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정우야.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걸 끝까지 고집스럽게 해내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정우는 뜻밖의 말에 놀라며 아버지를 쳐다봤다.
"근데 아빠가 반대하면 어떻게 해요?"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정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빠가 반대해도 괜찮아. 그땐 네 마음을 믿고 나아가라. 아빠는 결국 네 편일 거니까."

그날의 대화는 어린 정우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현재, 인터뷰장으로 돌아와서.

정우는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하고 싶은 걸 반대하실 수도 있다고 하셨지만, 결국엔 제가 제 길을 가길 바라셨던 거죠. 그 말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지금처럼 제 꿈을 위해 도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인터뷰어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 대화가 당신을 그렇게까지 강하게 만들었다는 거군요."
"네, 그날 아버지의 한 마디가 제 인생의 방향을 정해줬습니다. 저는 제 꿈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했죠."

그날 인터뷰가 방송되자, 많은 사람들이 정우의 이야기에 감동했다. 그리고 화면 너머로 그 인터뷰를 조용히 보고 있는 정우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끝까지 고집스럽게 해내라 했더니, 정말 잘 해냈구나, 내 아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룬 성취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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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은 누구보다 정직했다. 사람들은 그를 대쪽같은 사람이라 불렀다. 그는 언제나 도덕을 내세우며 살았고,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이기철 씨, 도덕적이시네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손을 더럽히지 않으시죠?”
그의 이러한 태도는 업계에서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지만,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살아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불편하고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돈을 벌 능력은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도덕적인 기준으로 비판했다.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 이렇게 말하며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가족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 가난과 싸우고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대기업에서 찾아온 고위직 변호사, 임 대표는 이기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업계에서 ‘도덕적인 사람’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를 테스트해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기철 씨, 우리가 이번에 하나의 큰 거래를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상 몇 가지 비밀스러운 일이 있어요. 혹시 우리가 이 거래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이기철은 직감을 느꼈다. 이 일이 그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일일 거란 확신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가족을 위한 절박함이 그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는 돈을 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당신이 뭘 원하든, 가족을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닐까요?” 임 대표는 말을 돌려 그를 유혹했다.

그는 처음엔 강하게 거절했지만, 반복되는 압박에 결국 결정을 내렸다. “이번 한 번만이야.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었어.”
이기철은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 번 손을 더럽혔다.



처음에는 단순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필요해서 그렇게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큰 돈을 벌게 되었다. 공과금도 해결되고, 아이들의 학원비도 문제없어졌다. 그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옳지 않다는 생각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유혹이 그를 찾아왔다.

그가 일을 맡고 나서부터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를 '도덕적 기준'으로 삼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임 대표는 다시 찾아왔다.
“이기철 씨, 이번에 더 큰 거래가 있습니다. 당신이 했던 일이 무사히 진행되었죠. 그런데 이젠 더 중요한 일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그는 갈등했다. 그의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면서 점점 더 많은 유혹이 그를 조종했다. "이번만, 이번만은 괜찮을 거야. 어차피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는 다시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점점 더 많은 타협을 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그렇게 그의 도덕성은 점차 사라졌다. 그가 생각했던 대로, 이기철은 결국 자기 욕망에 휘둘리며 더 큰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아내는 그를 향해 일갈했다.
“당신은 결국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한 거잖아요! 가족을 위해서, 그런 말로 변명하지 마세요. 당신이 욕망을 따라가고 싶어서 그랬잖아요!”
그 말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모르잖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그러나 그 속에서도 점점 더 자신이 택한 길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너무 멀리 갔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선택을 바꾸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결국 이기철은 자신이 원했던 대로 세상에 서게 되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누구보다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제 ‘대쪽 같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잃었고, 그를 칭송하던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도덕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이기철, 너도 결국은 그런 사람이었어?"
주변 사람들의 비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단지 자신이 원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젠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길은 너무 멀리 와버렸고, 그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한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그는 계속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진실을 외면했다.



그의 타락은 단지 그의 개인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특히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내는 그의 선택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고, 아들은 그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않았다.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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