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회사에서 몇 년째 묵묵히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회의 때는 눈에 띄지 않지만 맡은 일은 항상 실수 없이 처리했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조용히 신뢰를 쌓아온 사람이었다. 회의 때마다 의견을 묻는 질문이 오가도 그는 언제나 비슷한 말을 했다.
"음, 아직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의 답변은 무난했다. 말실수 없이 시간을 넘길 수 있는 안전한 방식이었고, 다른 팀원들 역시 지수의 이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지수는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던 어느 날, 새 팀장인 민영이 부임했다. 민영은 기존 팀장들과 달랐다. 회의실에 들어선 첫날부터 민영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우리 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그 시작은 솔직하고 자유로운 아이디어 공유에서 나옵니다."
지수는 민영의 태도가 조금 불편했다. '잠재력'이라니. 이미 모두들 자기 역할을 잘 하고 있는데, 굳이 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첫 회의 날, 민영은 각 팀원들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돌아가며 차례로 발표하던 중, 지수의 차례가 되었다.
"지수 님,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으신가요?"
지수는 평소처럼 답했다.
"아직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좀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민영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나쁜 아이디어라도 하나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지수는 당황했다. "나쁜 아이디어"를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 나쁜 아이디어는... 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민영은 잠시 지수를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사실 좋은 아이디어는 나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고민이 깊을수록 아이디어를 말하는 데 망설임이 생길 수 있죠. 그런데, 혹시 지수 님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하시나요?"
지수는 순간 머뭇거렸다. 이제껏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편입니다."
민영은 미소를 지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죠. 하지만 오늘부터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셨으면 합니다. 아이디어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생각하며 만들어가는 겁니다. 나쁜 아이디어라도 괜찮으니 다음 회의 때는 꼭 하나 준비해 주세요."
회의실의 분위기는 어색한 정적에 휩싸였다. 지수는 민영의 지시를 곰곰이 생각했다. '나쁜 아이디어라도 준비하라니. 지금까지 내가 잘못해왔던 걸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평소 회의에 임하는 방식을 되돌아봤다.
며칠 뒤, 지수는 민영의 요구대로 회의에 나쁜 아이디어를 하나 들고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팀원들 사이에서 조롱 섞인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민영은 그 아이디어를 듣고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지수 님. 이 아이디어를 조금만 다듬으면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날 이후, 지수는 회의에서 한 번도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매번 나쁜 아이디어를 한두 개씩 준비했다. 그 아이디어 중 일부는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지수는 점차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에서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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