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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은 고집이 셌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주저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스스로를 ‘논리의 전사’라 여겼고, 언제나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었다. 회사 회의에서도 늘 자신이 내놓는 의견이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했기에, 다른 의견이 나오면 주저 없이 논쟁을 벌였다.

이번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효율'을 강조하며 비용 절감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안을 주장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애썼다. 하지만 회의 결과, 그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 동료 선우의 ‘안정성’ 중심의 접근이 결정되었다. 우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이 제시한 방안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고 확신했는데도 팀의 최종 결정에서 밀려난 것이었다.

결국 회의가 끝나자 우진은 분통을 터뜨리며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도무지 이대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선우가 우진에게 다가왔다. "오늘 저녁에 술 한잔할래?"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우진은 처음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선우와의 대화로 자신의 답답함을 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작은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고 술잔을 몇 번 주고받은 후, 우진은 참다못해 선우에게 물었다. “선우, 솔직히 말해봐. 왜 네 의견은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내 의견은 자꾸 묵살당하는 걸까?”

선우는 우진의 질문에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꼭 내 의견이 옳아서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냥, 난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접근하려고 할 뿐이야. 꼭 내 의견이 다 맞다고 고집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고, 거기서 내 생각을 조정해보는 거지.”

우진은 얼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럼 네 생각을 버리고 타협만 한다는 거잖아? 난 그게 못 참겠어. 내 신념이 옳다면 끝까지 주장해야지, 그걸 포기하는 건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선우는 조용히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우진, 이건 내 생각인데… 가끔은 내가 완전히 옳을 필요가 없을 때도 있어. 오히려 상대가 내 생각을 받아들이고 함께 협력하려는 여지를 주면, 결과적으로 내가 얻고자 하는 실리도 얻을 수 있는 것 같더라고. 한 번 생각해봐, 상대방이 나를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우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선우의 말을 되새겼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이길 수 있는데, 왜 타협을 택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술잔을 기울이며 선우의 태도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여유와 안정감을 부러워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며 우진은 내내 자신의 생각을 곱씹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쉽게 꺾을 마음은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실리와 신념, 그 두 가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삶에서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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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혁은 어린 시절부터 특별했다. 그의 음악에는 남들과는 다른 강렬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무대 위에 서면 세상이 멈춘 듯했고,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의 이름은 빠르게 알려졌고, 그는 단번에 스타가 되었다. 대중은 그를 열광적으로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를 향한 차가운 시선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공의 이면에는 악플과 비난이 가득했다. "자기중심적이다"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억측부터, 그가 전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터무니없는 루머까지 퍼져 나갔다. 성혁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운 돌처럼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리 무대 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도, 뒤에서는 그를 폄하하는 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는 지쳐버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조차 희미해진 듯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음악을 향한 갈망은 여전했지만, 대중의 기대와 시선이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는 끝없는 부담감과 실망 속에서 도망치듯 활동을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의 작은 방에서, 성혁은 처음 음악을 시작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저 즐겁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던 자신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음악이 여전히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모든 활동을 접고 쉬었다. 자신을 되돌아보며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으려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다시 몸이 근질거렸다. 그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다. 성혁은 깨달았다. 그는 대중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은 열망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던 과거의 자신을 벗어던지고, 온전히 자신의 음악을 위해 복귀하기로 마음먹었다.

복귀 후, 성혁은 여전히 비난과 억측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태도로 그 모든 어려움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음악과 메시지에 집중했다. 사람들의 비난과 루머가 그를 무너뜨릴 때도 있었지만, 그는 음악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는 무대 위에서 말없이 노래로 자신의 진심을 전했고, 그의 음악은 점점 깊어지고 진솔해졌다.

성혁은 이제 악플과 루머가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상처들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는 그 상처들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의 기대와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복귀 후 그의 음악은 예전과는 다른 깊이를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느꼈고, 그의 음악에서 묵직한 진정성을 찾아냈다. 성혁은 이제 더 이상 대중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 자신으로서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어려움을 통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빛과 어둠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낸 것이다.

이제 무대 위의 성혁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그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그는 그 안에서 더 단단해지고 더 빛나는 자신을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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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대기업의 외주 협력사로 일하는 중견 컨설턴트였다. 이번 달, 본사와의 계약 갱신을 앞두고 있던 그는 어느 날 본사로부터 온 갱신 통지서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계약 조건이 무려 200퍼센트 인상된 것이다.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금액이었고, 이는 곧 그의 사업 운영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몇 년간 본사 제품을 열정적으로 홍보하며 현장 지원에 나섰는데, 돌아온 건 일방적인 인상 통지라니. 당장 본사 담당자를 찾아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그동안 한 노력이 이 정도 대우를 받을 일이란 말인가?" 그는 불공정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즉각적인 감정 표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며칠 뒤, 지훈은 본사 담당자와의 미팅에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회사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신 걸 겁니다. 저도 그 입장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계약이 저에게도 중요하듯이, 우리 협력관계가 회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리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 담당자와 함께 화면을 보며 말했다. “우선, 저희는 본사 제품을 자사 네트워크와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무료로 홍보해 왔습니다. 이번 분기만 해도 이로 인해 매출이 상승했다는 데이터가 있죠.” 이어 그는 계약 인상으로 인해 지훈의 재정적 부담이 커지게 되면 본사 역시 얻을 기회가 줄어들 수 있음을 차분히 설명했다.

또한 그는 추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현재 저희가 본사 제품을 홍보하는 동안, 타사에서는 이미 유사한 제품을 내세우며 같은 고객층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본사와 협력할 수 있다면, 이러한 경쟁 상황에서도 귀사 제품의 시장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계약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본사 제품의 빈자리를 누군가가 금방 차지하게 될 겁니다.”

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계약 인상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신중히 검토해 주신다면, 아마 다른 방안을 고려해주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저도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해주신다면, 앞으로도 더욱 적극적으로 본사 제품의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며칠 후, 그는 수정된 계약서를 받았다. 200퍼센트가 아닌 40퍼센트 인상으로 조정된 현실적인 조건이었다. 그는 계약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가 처음 느낀 감정에 휘둘려 담당자에게 격하게 따졌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의 항의는 감정적으로 비춰졌을 것이고, 본사는 그의 불만보다는 계약 인상의 정당성만을 강조하며 협력사를 대체할 방법을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 지훈은 이 경험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감정을 조절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는 태도가 더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되뇌었다. “화가 날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설득의 시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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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은 오늘도 송아지를 축사에서 풀밭으로 옮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앞에서 밧줄을 잡고 송아지를 끌어당겼고, 아들은 뒤에서 온 힘을 다해 밀어 보았다. 송아지는 느긋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송아지의 태도에 땀이 흐르고 숨이 차오를 무렵, 둘은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길가를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눈가에 웃음을 머금은 그녀는 다가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애들아, 내가 조금 도와줄까?”

아버지와 아들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송아지 앞으로 다가가더니, 뜻밖에도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송아지의 입가에 갖다 대며 그에게 살짝 물리도록 했다. 송아지는 놀란 듯 잠시 멈칫하더니 곧 아주머니의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송아지의 혀와 달리, 아주머니는 미소를 머금고 차분히 송아지를 향해 말했다.

“얘야, 이리 가자. 이렇게 천천히 가면 되지 않겠니?”

송아지는 아주머니의 손가락을 핥으며 서서히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놀라움에 찬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송아지가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며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주머니가 송아지를 풀밭에 도착시키고 나서야,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송아지가 그렇게 쉽게 따라오게 하셨나요?”

아주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송아지든 사람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스스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 억지로 끌고 가려고만 하면 더 저항하는 법이야.”

아버지와 아들은 그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이 경험은 송아지를 옮기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한 깊은 교훈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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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과 민석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강준은 사회사업가였다. 평범한 직업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때 그가 느끼는 충만감이 모든 보상처럼 여겨졌다. 매일 작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그는 일에 대해 나름의 자부심을 가졌다. 강준은 항상 바쁜 일정 속에서도 지역 행사에 참여하거나 자원봉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세우려 했다. 그런 그의 삶은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하고, 변화는 느렸지만 한결같았다.

민석은 투자 전문가로, 속도감 있게 성장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전략가로 자리 잡았고, 위험을 감수하며 빠르게 실적을 쌓아가며 성공의 길을 걷고 있었다. 민석에게 성공은 목표에 닿는 순간순간의 쾌감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증명해야 하는 그의 삶은 늘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성공이란 매 순간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시시각각 변화하는 숫자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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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두 사람은 동문회에서 재회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서로에게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강준의 주위에는 그가 도운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고, 민석은 동창들 사이에서 성공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준과 민석은 서로의 삶을 보고 감탄과 의문이 교차하는 시선을 느꼈다.

둘은 대화 중 과거 학교 축제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학창 시절 강준은 무대 뒤에서 일을 도맡아 했고, 민석은 사람들 앞에서 결과물만 보던 성격이었다. 강준은 사람들이 무대에 집중하도록 돕는 일이 즐거웠고, 민석은 어떻게든 무대 위에 서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그대로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음을 둘 다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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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고, 강준과 민석만이 남았다. 민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강준, 넌 일하면서 느끼는 게 뭐야? 난 매일 숫자에 쫓기다 보니 가끔은 너무 허무해질 때가 있더라.”

강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답했다.

“음... 나도 늘 행복한 건 아니야. 매번 성과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아서, 가끔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 작은 변화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 걸 느끼면 내가 걸어온 길에 의미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돼.”

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수많은 목표를 달성하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에 정말 깊이를 더해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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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후, 민석은 대규모 거래에서 예상치 못한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의 상황이었고, 모든 것이 잘못된 길로 흘러갔다.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매일 밤을 지새웠고, 삶의 방향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준이 불쑥 찾아와 말했다.

“민석아, 실패도 한 과정일 뿐이야. 네가 지금껏 쌓아온 건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 잠시 멈추고 돌아봐도 괜찮아.”

그 말을 들은 민석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더 이상 숫자와 결과에만 몰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후 민석은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쳤던 일들을 조금씩 되돌아보았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까지 그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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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민석은 자신을 위해 새로운 투자를 시작했다. 빠르게 성과를 내는 대신, 자신이 관심 있는 사회적 가치를 가진 프로젝트에 투자하며 천천히 결과를 기다렸다. 여전히 숫자로 보여지는 성과도 중요했지만, 이제 그는 그것을 넘어서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성공을 느꼈다.

강준과 민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성공을 존중하며 삶의 다양한 무게를 공유하는 친구로 남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각각 존경과 신뢰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그들의 성공이 각자의 방식대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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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하루를 열고, 경멸로 하루를 닫았다. 정치와 경제 뉴스 속 부패한 인물들이 자리를 차지할 때마다 그는 혀를 차며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도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썩어버린 세상이지.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정직함을 자랑으로 삼았다.

아들 현우에게도 정수는 자신의 신념을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현우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랐다. 그는 친구들이 규칙을 어기면 곧바로 선생님께 알렸고, 도덕을 어기는 친구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정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현우는 그의 도덕적 후계자였고,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아 줄 사람이라고 믿었다.

“현우야,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라면 외로워질 수도 있는 거야. 세상과 맞서 싸우다 보면 아무도 네 편에 서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도 옳다면, 그 길을 가는 게 맞는 거지.” 정수는 아들이 점점 친구들과 소원해지고 외톨이가 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정의의 무게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외로움을 감수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정의의 길이라 믿었고, 현우도 그런 아버지의 말을 굳게 받아들였다.

현우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더 엄격하고 단호한 도덕주의자가 되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실수하거나 잘못을 하면 가차 없이 비난했고, 온라인상에서도 부정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단호하게 자신을 고립시켰지만, 정수는 오히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대견하게 여겼다. 고독은 정의를 위한 대가이며, 현우는 진정으로 정의로운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는 거리에서 불의를 마주했고, 그들과 말다툼이 벌어졌다.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그는 타협 없이 자신의 정의를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현우는 그들의 분노를 샀고, 끝내 폭행을 당하게 되었다. 그날 정수는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수는 서둘러 현우가 쓰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차갑게 식은 아들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가르친 정의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되짚어보았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신봉해온 정의의 무게가 어쩌면 현우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평생을 바쳐 지켜온 신념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도덕적 기준이 과연 옳았는지 그는 깊은 의구심에 빠졌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정수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무거운 죄책감과 함께 자라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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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유통업체의 CEO다. 젊은 시절,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 남들보다 훨씬 불리한 출발선을 딛고 일어섰다. 끈기와 수완을 무기로, 태호는 차근차근 재산을 모아 지금은 몇백억 대의 사업을 운영하는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언제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모호한 변명이 따라다녔다.

태호는 10년 전, 온라인 유통 시장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정직하게 운영하려 했지만, 사람들의 소비 패턴을 분석하던 중 깨달았다. 고객들이 저렴한 가격과 빠른 배송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공급망을 최대한 압박하고, 불법 하청 업체들과 손을 잡았다. 그곳은 근로자들에게 최저임금조차 지급하지 않았지만 태호는 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태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사람들이 싸고 빠르게 받고 싶어 하잖아. 나도 먹고 살아야지. 누구라도 나처럼 성공을 원한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그의 눈에는 자신의 사업 방침이 단지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합리적인 선택에 불과했다.

몇 년 후, 태호의 유통업체는 급성장했지만, 그와 경쟁하려는 회사들도 많아졌다. 그중 한 경쟁사가 빠른 배송 서비스로 인기를 끌자, 태호는 그 회사를 몰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조직적으로 가짜 리뷰와 악성 루머를 퍼뜨려 그 회사를 공격했고, 결국 그 경쟁사는 문을 닫았다. 해당 회사의 대표는 빚더미에 앉았지만, 태호는 이를 자신의 책임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지인들에게 태연히 말했다.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그 회사를 무너뜨렸을 거야.” 그는 자신이 단지 ‘비즈니스의 법칙’을 따랐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의 고통에는 눈을 감았다.

사업이 커질수록 세금도 늘어났고, 태호는 점점 불편해졌다. 그는 고액의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하다며 회사 자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고, 세금을 포탈하기 시작했다. 국세청의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도 그는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탈세 정도는 하는 거야. 부당한 세금에서 나를 보호하는 건 당연하지.” 태호는 국가가 매긴 세금을 피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고, 자신을 피해자로 여겼다. 자신을 ‘부당한 시스템에 맞서는 현명한 사업가’라고 여기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같은 논리를 설파했다.

결국 태호는 수십억 원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검사와 판사, 방청석의 사람들은 그의 비뚤어진 논리에 혀를 내둘렀지만, 태호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법정에서 늘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 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누가 됐든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호했고, 얼굴엔 미묘한 자부심마저 감돌았다. 방청석에서는 속삭임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태호는 그 말이 결코 변명이 아닌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신이 진정 피해자이며, 불가피한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그 믿음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속아 있었고, 오히려 법정에 서서도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확신했다. 그 모습에 법정에 모인 사람들, 그의 옛 동료와 친구들, 그리고 피해자들은 오싹함을 느꼈다. 이 사람에게는 반성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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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항상 무언가를 미루기 일쑤였다. 마감일이 다가오는데도 논문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졸업을 앞두고도 취업 준비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할 일은 산더미였지만, 그는 늘 바쁜 척만 했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같았다. "어려워서 못 하겠어." 또는 "하기 싫어서 안 해." 두 마디로 모든 걸 정당화하며 방어기제를 세웠다.

첫 번째로 논문이었다. 졸업 논문 마감일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준호는 여전히 빈 페이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지도 교수는 여러 차례 피드백을 주며 빨리 초안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준호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민석이 물었다.

"준호야, 논문은 언제쯤 끝낼 거야? 아직 시작도 못 했다고 들었는데."

준호는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주제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손을 못 대겠어. 차라리 쉬운 주제로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

민석은 준호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정말 어려워서 못 하는 거야? 아니면 하기 싫어서 미루고 있는 거 아니야?"

준호는 순간 민석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곧바로 반박했다. "아니야, 진짜로 어렵다니까. 내가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그렇지."

그러나 준호의 변명은 그 이후로도 반복되었다. 친구들이 주말 산행을 가자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바쁜 취업 준비 중에 스트레스를 풀 겸 산에 가기로 했지만, 준호는 처음부터 거절했다.

"난 등산 별로 안 좋아해. 힘들기만 하고, 시간 낭비 같아."

친구들이 한 번 더 설득하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 빼고 다녀와. 난 가기 싫어."

그 순간, 민석이 냉정하게 말했다. "또 하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솔직히 말해, 힘들까 봐 겁나서 안 가는 거지?"

준호는 짜증이 났다. "그게 아니라니까, 그냥 등산 자체가 재미없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민석은 준호의 말을 듣고도 멈추지 않았다. "취업도 그렇잖아. 너 아직 어디 지원도 안 했지? 요즘 일자리 어렵다고만 하고 준비도 안 하고. 진짜 어렵고 무서운 게 아니라 네가 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준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민석의 말은 그의 마음속 깊이 찔려 들어왔다. "하기 싫어서"와 "어려워서 못 한다"는 변명이 더 이상 그를 감싸주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준호는 방에 앉아 혼자 생각에 잠겼다. 모든 핑계와 변명을 떠올리며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짚어보았다. 논문도, 산행도, 취업도. 결국, 그는 어려운 일과 싫은 일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그저 방어기제 속에 갇혀 자신을 위로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준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앞서 나갔다. 민석의 말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어려워서 못하는 거잖아." 하지만 준호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지 못한 채,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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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우는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오직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는 것을 최고의 전략으로 여겼다. 그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은 일에만 집중하고, 퇴근 후에는 철저히 개인의 삶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일과 삶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항상 다짐하면서, 업무 시간에는 맡은 일을 처리하고 마감이 가까워지면 시계를 보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석우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퇴근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주말과 휴일을 기다리며 취미로 즐기는 요리, 영화 감상, 등산 등을 통해 삶의 만족을 느끼려 애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퇴근 후의 시간에도 마음이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항상 부족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된 석우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업무의 압박이 클수록 석우는 더욱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두 영역은 점점 얽히기 시작했다. 그는 퇴근 후에도 계속 프로젝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쾌하고 불행한 업무 시간을 하루 빨리 벗어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았지만, 정작 자유를 얻고 나면 다시 허무함이 찾아왔다. 취미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집중하기 어려웠고, 항상 회사 일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우는 회사의 한 연수 프로그램에서 업무 몰입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사는 몰입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일상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석우는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그는 언제나 일이 끝나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사의 말 중 한 문장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일이 끝난 후에만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불행한 시간으로 규정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 말은 석우에게 충격처럼 다가왔다. 그는 문득 자신이 하루의 절반을 불행한 시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퇴근 후의 시간만을 기다리며, 일하는 시간을 도망쳐야 할 시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며칠 후, 그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던 중 더 이상 퇴근 시간을 의식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 지금 맡고 있는 일을 최대한 몰입하여 처리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는 하나씩 작은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목표들은 그저 그날의 업무를 완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업무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들이었다. 그는 메일 작성 하나, 보고서 작성 하나에도 조금 더 신경을 쓰고, 더 나은 방식을 찾아 나갔다.

그렇게 일에 몰입하면서 석우는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일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행복감을 느꼈다. 작은 성취감이었지만, 그 자체가 그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업무가 단순히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닌, 도전하고 완수해낼 수 있는 무언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 후로 석우는 퇴근 후에도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도망치듯 퇴근하지 않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 꽤 괜찮았어'라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취미 활동을 할 때도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몰입을 찾으려 노력했다. 요리를 할 때면 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며 즐기고, 등산을 할 때는 산의 바람과 풍경을 온몸으로 느꼈다.

석우는 이제야 진정한 의미의 '밸런스'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몰입하고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하는 동안에도 몰입하면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고, 퇴근 후에도 몰입하지 않으면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쫓지 않았다. 일이든 취미든,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야말로 그의 삶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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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는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자리에 나갔다. 자리의 분위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시시껄렁한 농담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채워졌다. 연예인 소식, 회사 생활, 주말 계획이 오갔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대화가 한참 진행되던 중, 한 친구가 준호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

"야, 넌 진짜 늘 똑같다. 주말엔 뭐 하냐고 물어도 늘 똑같은 답만 하고. 너 인생에 무슨 재미가 있냐?"

그 말은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준호의 가슴 속에 작은 불씨처럼 불편함이 자리 잡았다. 그는 그저 웃어넘겼지만, 그 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며 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똑같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준호는 거실을 오가며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다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고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분노와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친구의 농담 하나가 그의 일상을 흔들어 놓은 셈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거실을 서성이던 준호는 문득 책장 쪽을 바라봤다. 몇 년 전 사놓고 읽지 않았던 책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고, 그 중 한 권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준호는 무심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이별을 앞두고 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준호야, 나는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이 멋지다고 느껴지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엔 깊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랐어. 그래서… 넌 스스로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어."

그때 준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요구가 너무 높다고 생각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존경이라니, 그런 게 왜 필요한 건데? 넌 그냥 너무 많은 걸 바라잖아!" 그렇게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끝냈지만, 그 말은 마음 한 구석에 늘 남아 있었다.

준호는 손에 든 책을 천천히 펴고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인간의 시간 사용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책은 사람의 시간이 생산, 유지, 여가의 세 영역으로 나뉘며, 오직 여가만이 자신이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준호는 그동안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써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TV와 인터넷, 가벼운 술자리로 흘려보낸 시간들이 눈앞을 스쳤다.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루 24시간 중, 진정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8시간뿐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준호는 작은 변화부터 시작했다. 자기 전에 책을 읽고, 하루를 돌아보며 짧은 글을 쓰는 습관을 들였다. 주말에도 무심코 TV를 켜는 대신, 도서관에 가서 강연을 듣거나 산책을 나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8시간은 짧게 느껴졌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하루가, 그리고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고, 준호는 다시 친구들과 술자리에 나갔다. 여전히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농담이 오가던 중, 한 친구가 말했다.

"준호, 요즘 너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예전엔 그냥 늘 똑같아 보였는데, 이제는 좀 더 활기차 보여."

그 말에 다른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예전처럼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내가 그동안 시간을 어떻게 써왔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 예전엔 주말마다 무심코 흘려보냈는데, 이제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쓰려고 하고 있어."

친구들은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대단한데? 요즘 뭐에 빠진 거야?" 한 친구가 물었다.

준호는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특별한 건 없어. 그냥 하루에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거지."

술자리는 여전히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준호의 마음속에는 전과 다른 뿌듯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자리, 같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준호는 이제 단순히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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