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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1일, 한서윤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릿한 겨울 하늘 아래 바람은 차갑게 불었고, 도로 위를 오가는 차들 사이에서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TV 화면에 각인된 숫자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79. 그리고 2.

사고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만 해도 그것은 단순히 뉴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숫자는 점점 더 무겁게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179명. 사람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숫자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를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가족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떠나간 사람들, 그들이 남기고 간 공허함.

그리고 2명.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느낄까? 그녀는 그들의 목소리가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순간마다 마음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했다.



서윤은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은 켜져 있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고와 아무 상관도 없는 그녀였지만, 마치 그 비극이 자신의 삶을 침범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녀는 공허하게 책상을 노려보다가, 한쪽 구석에 놓인 오래된 공책에 시선을 멈췄다. 몇 년 전 새해를 맞아 산 공책이었다. 대부분의 페이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공책을 집어들고 펜을 꺼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손이 떨리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러나 몇 번이고 펜 끝을 종이에 대던 그녀는 결국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179+2. 이 숫자는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펜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펜을 움직였다.

"그 숫자는 내게 무력함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세상의 비극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글을 쓰는 동안 서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슬픔이 펜 끝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글을 적어나갔다.

"나는 이 숫자를 기억하겠다. 179명의 삶과 2명의 생존을 잊지 않겠다. 이 공허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서윤은 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느끼는 무기력과 공허함에 대해 썼다. 그러다 차츰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상상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

글을 쓰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느꼈던 무기력함은 이제 희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 비록 작더라도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2025년 1월 1일, 서윤은 다시 공책을 펼쳤다. 창밖으로 새해의 첫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펜 끝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179+2. 그 숫자는 이제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슬픔과 공허 속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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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누구보다 평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안정된 직장, 나쁘지 않은 연봉, 무난한 인간관계. 모두가 꿈꾸는 삶이었지만,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끝없는 공허함이었다. 매일 똑같은 아침, 똑같은 일, 똑같은 저녁. 친구들과의 술자리나 여행도 더 이상 그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민재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드는 법’이라는 영상을 보게 됐다. 그 안에서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편안한 하루는 쉽게 잊혀지지만, 불편한 하루는 오래 기억되죠. 적당한 불편함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 말을 들은 민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삶에서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는 그날부터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처음에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면 묘한 상쾌함이 몰려왔다. "이건 괜찮은데?"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그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한 블록을 뛰는 것조차 버거웠다. 다리가 뻐근하고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땀이 흐를 때마다 묵직한 생각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민재는 달리기 끝에 공허 대신 성취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민재는 자신의 일상에도 ‘적절한 고통’을 더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퇴근 후에는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 정한 독서 노트를 썼다. 쉬운 책이 아니라, 머리를 쓰게 만드는 철학서나 인문학 서적이었다.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책 한 권을 끝낼 때마다 그는 마치 산을 넘은 듯한 충만함을 느꼈다.

주말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시설에서 고된 일을 돕는 건 육체적으로 피곤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묵직하게 채웠다. 이 모든 활동은 그를 지치게 했지만, 그 지침 속에는 묘한 활력이 있었다.

친구들은 그의 변화를 의아해했다.
“굳이 그렇게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있어? 그냥 편히 쉬면 안 돼?”
하지만 민재는 웃으며 말했다.
“몸이 힘들면 이상하게 마음은 가벼워지더라. 그게 더 나아.”

그는 이제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 하루를 살아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아침에 차가운 물을 맞을 때, 숨이 가쁘도록 뛰고 땀을 흘릴 때, 고된 일을 끝내고 나서 드는 성취감을 통해 민재는 깨달았다.

“고통은 삶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해주는 가장 순수한 방식일지도 몰라.”

이제 민재의 하루는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었다. 그는 더 이상 권태로운 일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권태를 이겨낼 무기를 손에 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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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민호와 세연

민호는 언제나 밝고 단단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서 돕느라 늘 바빴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누구보다 잘 웃어주었다. 가끔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어도, 민호의 자신감은 그의 겉모습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세연은 달랐다. 그녀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강남의 스카이라인은 그녀의 배경이었고, 부모님은 세연의 학업과 장래를 위해 무엇 하나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완벽하게 보이는 세연의 마음속에는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민호 같은 애는 늘 당당하지? 가진 것도 없으면서…”

세연은 민호가 웃고 떠드는 모습만 봐도 어딘가 불편했다. 민호가 자기가 이룬 것도 없는 주제에 주목받는 게 싫었고, 자신이 가졌지만 채우지 못한 것을 민호가 가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2장: 연극 대회 준비

학교에서 반 대항 연극 대회가 열리기로 했다. 민호가 팀장이 되었고, 세연은 그 사실을 듣자마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왜 민호가 팀장이야?” 세연은 친구들에게 물었다.
“민호가 제일 열심히 하잖아. 다들 좋아하고.”

세연은 불만스러웠다.
“그냥 다들 만만하니까 따라가는 거겠지.”

연극 회의가 시작되었다. 민호는 친구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받아들이며 대본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우리 연극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면 좋을 것 같아.”

세연이 손을 들었다.
“민호야, 그거 너무 뻔하지 않아? 관객들이 재미없어할 것 같은데.”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세연이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

세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난 민호처럼 뻔한 생각은 안 할 것 같은데.”

주변 친구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민호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좋아. 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



3장: 세연의 결핍

세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혼자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이렇게 민호가 싫을까?”

그녀는 민호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세연은 완벽한 성적표와 우아한 집안을 자랑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민호처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즐겁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민호를 무시하는 말을 할 때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미묘한 침묵은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부모는 늘 말했다.
“세연아, 너는 1등이어야 해. 세상은 네가 약해지는 걸 허락하지 않아.”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세연은 웃음조차 계산하며 살았다. 그래서 민호 같은 아이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는 민호가 왜 그렇게 당당한지, 세연은 알 수 없었다.



4장: 갈등의 폭발

연극 연습이 진행될수록 민호와 세연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민호는 늦은 시간까지 남아 친구들의 연기를 도왔고, 모두가 그의 노력에 점점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세연은 점점 소외감을 느꼈다.

어느 날, 연습 도중 민호가 친구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을 때, 세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민호야, 너 좀 너무 우쭐대는 거 아니야? 솔직히 네가 잘해서 연극이 잘 되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맞춰주는 거지.”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민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물었다.
“세연아, 내가 뭘 잘못했어?”

그러나 세연은 멈추지 않았다.
“잘난 척하지 마.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순간, 교실 안은 더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민호는 세연의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래, 나는 가진 게 많지 않아. 하지만 난 지금 이 순간이 좋아. 너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순간이야.”

세연은 민호의 눈빛을 보고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입에서는 또다시 후회할 말이 나왔다.
“어차피 너는 평생 이런 걸로 만족하며 살겠지. 별 기대할 것도 없으니까.”

민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5장: 후회와 깨달음

그날 밤, 세연은 집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민호에게 했던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했지? 그 애는 나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민호는 자신이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알았다. 반면, 세연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민호가 나를 미워한 적은 없는데, 왜 나는 그 애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세연은 처음으로 자신의 불안을 마주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늘 비교당하며 자랐던 자신의 모습을.



6장: 다른 길

연극 대회는 민호가 이끈 반의 승리로 끝났다. 민호는 친구들과 기쁨을 나눴고, 세연은 뒤에서 그 장면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졸업 후, 민호와 세연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민호는 부모님의 가게를 이어받아 행복하게 살았고, 세연은 끊임없이 성공을 쫓았다.

그러나 가끔, 세연은 민호를 떠올렸다. 자신이 미워했던 것은 민호가 아니라, 민호가 가진 결핍 없는 당당함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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