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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은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봉사 동아리 활동에 몰두했고, 졸업 후에도 지역 아이들에게 학습 지원을 이어갔다. 주말도 잊은 채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그는 자신의 삶을 헌신으로 가득 채웠다.

그 과정에서 동아리는 지역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인정을 받았고, 그의 노력 덕분에 많은 아이들이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마음 한편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는 누군가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남겼다고 믿었지만, 자신의 헌신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점점 더 불확실해졌다.

특히 마음을 많이 쏟았던 아이는 수민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항상 밝고 열심히 노력했던 수민은 현준에게 특별했다. 그는 수민의 대학 진학을 위해 주말을 반납하며 공부를 도왔고, 필요한 교재도 자신의 돈으로 사주었다. 수민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현준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 후 수민의 연락이 뜸해졌다. 현준은 바쁜 대학 생활 속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섭섭함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수민의 SNS 글을 보게 되었다.

> “앞으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갈 거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스스로 정말 열심히 해왔고, 나를 믿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지금까지 잘 해온 나 자신에게 칭찬하고 싶다.”



글을 읽는 순간, 현준은 마치 가슴에 돌을 얹은 듯한 무거움을 느꼈다. 글의 내용은 수민 스스로의 성장을 자랑하는 것이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날 밤, 그는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왜 이렇게 서운한 걸까? 결국, 내가 선택해서 한 일이었잖아. 그런데도 나를 기억해주길 바란 건 내가 욕심을 부린 걸까?”

며칠 후, 그는 여느 때처럼 동아리 회의에 나갔다.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동료 윤정이 다가와 말했다.

“현준 씨, 요즘 좀 힘들어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현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수민에게 느낀 섭섭함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 같은 상실감을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윤정은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은 뒤 입을 열었다.

“현준 씨,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어차피 누군가의 감사나 인정 때문에 하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누군가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우리가 남긴 흔적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어디엔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는 우리가 알아주면 되는 거 아닐까요?”

윤정의 말은 단순했지만 묘하게 현준의 마음을 울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여전히 상처받은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지만, 윤정의 말 속에서 작은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남긴 흔적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해도 어디엔가 남아 있을 거다…”

그는 스스로를 조금씩 다독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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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와 메리트로폴리스는 서로를 증오했다.
아르카디아는 품격과 전통을 신봉했다. 귀족의 고고한 태도와 도덕적 우월감은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반면, 메리트로폴리스는 경쟁과 능력을 숭배했다. 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효율과 실용성이야말로 문명을 진보시키는 도구라고 믿었다.

이 두 사회의 대표 인물인 레오나와 에릭은 공개 토론회에서 맞섰다. 수백만 명이 방송을 지켜보며 그들의 입장을 경청했다.

“당신들의 사회는 천박합니다.” 레오나가 손을 들어 말문을 열었다. “돈 몇 푼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아십니까? 우리 아르카디아에서는 품격과 전통이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합니다.”

에릭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 “품격이요? 그 품격이라는 게 결국 출생으로 정해지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귀족이 될 수 없다면, 그건 단지 차별일 뿐입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정의로운 시스템을 가지고 있죠.”

“정의라니!” 레오나는 소리쳤다. “돈만 좇다가 인간성을 잃어가는 것을 정의라고 부르겠습니까? 당신들의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하며 서로를 짓밟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인간의 품위라...” 에릭은 조소를 머금었다. “귀족 계급 아래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의 품위는 누가 보호합니까? 당신들의 전통은 인간을 속박하고, 발전을 가로막는 구시대적 유물일 뿐입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점점 격렬해졌다. 마치 누가 더 이상적이고 우월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 겨루는 듯했다. 그러나 청중들 중 상당수는 점점 지쳐갔다. 그들의 말은 화려했지만, 삶의 현실을 담기엔 공허했다.

그때였다.

무대 아래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비루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허름한 옷에 구겨진 모자, 무거운 노동으로 굽은 어깨까지, 그는 한눈에 봐도 하층민임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비웃었고, 누군가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무대 위로 올라섰다.

“저기, 딱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막으려 했지만, 그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레오나와 에릭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품격이니, 돈이니... 참 대단한 얘기들 하십니다.” 남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는 두 사회 어디에서도 대접받아본 적이 없네요. 아르카디아에선 태생이 하찮아서 무시당했고, 메리트로폴리스에선 돈이 없어서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멋진 품격과 돈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겁니까?”

레오나와 에릭의 얼굴이 굳었다.

남자는 레오나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당신들 아르카디아에서는 품격이 중요하다면서, 품격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그냥 하인으로 살라고 하죠. 내가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내 잘못입니까? 품격이라는 말로 나 같은 사람을 짓밟는 건 고상한 겁니까?”

그는 이번엔 에릭을 향했다.
“그리고 당신들 메리트로폴리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요? 내가 아무리 일해도 내 몫은 겨우 생계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스템이 날 성공할 수 없게 만들었죠. 이게 전부 내 능력 부족 때문인가요? 아니면, 당신들 사회가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은 고려하지 않는 겁니까?”

그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결국, 품격도 돈도 당신들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핑계 아닙니까?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아요. 남들보다 조금 나은 척하면서 자기 우월감에 취해 있는 거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의 허름한 뒷모습이 무대 조명 아래 작아지며 사라졌다.

레오나는 말문을 열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에릭도 반박하려 했으나, 그 순간 자신이 말하려던 모든 논리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토론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청중들도 누구 하나 박수치지 않았다.

레오나는 조용히 자문했다.
“품격...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지?”

에릭은 고개를 숙였다.
“돈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그날 이후로 두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한마디는 두 사람의 마음 깊숙이, 그리고 수많은 청중의 내면에 균열을 남겼다.

결국, 그 비루한 남자의 말처럼, 품격과 돈은 인간의 자기만족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되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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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겨울은 유리에게 낯설고 차가웠다. 15년 동안 캐나다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한국은 더 이상 편안한 고향이 아니었다. 도시의 번잡함, 낯선 규칙,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를 이방인으로 느끼게 했다.

처음 서울의 지하철에 올라탔을 때, 유리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서로 밀착해 서 있었고, 유리는 혼자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의 가방이 계속 허리를 찌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영어로 된 목소리에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외국 사람인 줄 알았네. 우리말 못 해요?”
유리는 당황했지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한국말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 자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유리가 환승 카드를 찍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자, 뒤에서 한 중년 남성이 투덜댔다.
“아, 진짜. 뭐 하는 거야? 요즘 젊은 애들 답답하네.”
그 말에 유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캐나다에서는 누구도 이런 작은 실수로 사람을 재촉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어려움보다 더 복잡한 문제들이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 씨는 소맥 만들어봤어요? 아니면 맥주만 마시나요, 외국식으로?”
다른 사람들은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유리는 당황하며 어설프게 소맥을 섞어 보였지만, 이미 자리를 채운 미묘한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업무 회의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유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마다, 동료들은 “그건 여긴 좀 다를 것 같은데요”라며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동료들은 그녀를 너무 서구적이라 느꼈고, 유리는 이곳에서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리는 점차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이질적인가? 한국에 맞는 방식으로 바꿔야 하는 걸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바꾸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공공장소에서의 작은 사건들은 그녀에게 상처를 남겼다. 카페에서 영어로 된 이메일을 작성하다가 옆자리 사람들이 흘깃거리는 것을 느끼거나, 길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었을 때 돌아오는 짧고 차가운 대답들.

그러던 어느 날, 유리는 인터넷에서 다문화 커뮤니티를 발견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리는 처음으로 자신이 느꼈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외국인처럼 보이고, 외국에서는 한국인처럼 보였어요. 결국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 모임에서 만난 한 참가자가 말했다.
“경계에 있다는 건 사실 굉장한 강점이에요. 두 문화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그 말에 유리는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질감은 단점이 아니라,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

유리는 회사에서 자신만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동료들에게 해외에서 배운 업무 방식을 공유하고, 국제 프로젝트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인정받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영어로 길을 묻는 외국인을 발견했을 때, 유리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움을 주었다. 상대방의 감사 인사에,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연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몇 년 후, 유리는 다문화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을 시작했다. 강연에서 그녀는 말했다.
“경계에 서 있는 건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라, 연결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이용하며 서울 곳곳을 다녔다. 그리고 더 이상 외계인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울이라는 세계에 뿌리를 내린 연결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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