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처음에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라 생각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부엌에도, 집 밖에도 아무도 없었다. 마을을 돌아다녀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텅 빈 길을 걸으며, 부모님은 물론 이웃들까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처음 며칠은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어디선가 모두 돌아올 거라는 믿음 하나로 집 안의 음식을 나눠 먹으며 버텼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은 점점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졌다. 외롭고 불안했지만, 소년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며 편의점과 마트를 오가며 음식을 구해왔고, 물도 찾아내며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무려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소년은 낯선 고독에 익숙해졌지만,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생명이 소년의 마음을 흔들었다. 집 앞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말도 안 되게 쓸쓸한 눈빛을 가진 강아지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강아지에게 다가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너… 어디서 왔어?”
소년은 강아지의 고운 털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강아지는 겁내지 않고 소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소년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감정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강아지를 소중히 안아 올리며 말했다.
"너를 보니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 같아. 이제 내가 너의 가족이니까."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강아지를 내려놓고 부드럽게 말했다. "넌 이제 ‘별’이야. 밤하늘의 별처럼 나에게 빛이 되어줬으니까."
별은 이름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꼬리를 흔들며 소년을 따라 걸었다. 소년은 그날 이후 매일같이 별에게 이야기를 쏟아냈다. "별아, 오늘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아침이 되면 소년은 별에게 하루 계획을 들려주었고, 밤이 되면 하루의 일과와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별은 소년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며 옆에서 늘 함께해 주었다. 소년에게 별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문제가 생겼다. 마을에 남아있던 음식이 거의 다 떨어져 갔다. 가게의 선반들은 텅 비었고, 이제는 편의점이나 마트 어디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소년은 결국 결심했다. 별과 함께 마을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로.
"별아, 우리 이제 떠나야 할 것 같아." 소년은 배낭에 남은 물건들을 챙기고, 별의 고운 털을 쓰다듬으며 다짐했다. "우리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도 만날 수 있겠지."
소년과 별은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마을을 벗어났다. 처음으로 나서는 낯선 길이었고, 소년의 마음은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소년은 기대에 찬 마음으로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는 오래된 물건들과, 누군가 남기고 간 자잘한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에서 생활했지만 갑자기 사라진 듯한 흔적들. 소년은 그 흔적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그날 밤, 소년은 별과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에게 속삭이며 작은 희망을 다졌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을 거야. 분명히 누군가는 살아 있을 거야. 우리가 꼭 찾아내자."
소년과 별은 그렇게 매일 길을 걸어갔다. 마을마다 들르며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모두 사라진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문득 길을 걷다가 지친 소년이 별에게 말을 걸었다. "너와 내가 왜 이곳에 남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계속 걸어가다 보면,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별은 소년을 바라보며 조용히 꼬리를 흔들었고, 그 모습에 소년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길을 나섰다.
소년과 별은 사람이 없어진 황량한 세상을 묵묵히 걸었다. 희미한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며, 소년과 별은 무언가를 찾기 위한 여정을 계속했다.
소년과 별은 길 위에서 수많은 흔적을 만났다. 낡고 먼지 쌓인 식료품, 흩어진 옷가지, 급히 버려진 가방들까지—마치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나다 실패한 듯한 흔적들이었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일지 생각했지만, 대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별과 함께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소년에게 힘을 주었다.
어느 날, 소년과 별은 오래된 고층 빌딩이 서 있는 도시로 들어섰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도시의 풍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소년은 텅 빈 거리와 부서진 유리창을 보며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걸까… 여기도 빈 껍데기만 남았네."
소년과 별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물과 음식을 찾았다. 남아 있는 캔 음식 몇 개를 발견해 허기를 달랬지만, 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렇게 길고 긴 여정을 이어가던 어느 날, 별이 몸을 웅크리고 아픈 듯이 신음했다.
"별아, 괜찮아?" 소년은 깜짝 놀라 별을 안아들고 가방에 남은 물과 약간의 음식을 별에게 먹였다. 별이 지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자 소년은 애타게 손을 뻗어 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지켜줄게. 너도 나를 도와줬잖아."
며칠 동안 소년은 별을 간호하며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소년은 불안한 마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별의 곁을 지키며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별아, 넌 나의 별이잖아. 넌 분명히 다시 건강해질 거야."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보살핀 덕분에, 별은 서서히 기력을 되찾았고, 다시 소년과 함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별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점점 더 먼 곳으로 나아갔다. 이젠 마을과 도시를 넘어 황량한 벌판과 거친 산을 지나야 했다. 길은 갈수록 험난했지만, 소년은 별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먼 곳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별아, 저기 봐! 저기에 누군가가 있을지도 몰라!" 소년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별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별도 지친 몸을 일으켜 소년과 함께 힘차게 달렸다.
소년과 별은 그렇게 연기가 나는 곳을 향해 끝없는 길을 걸었다. 소년의 마음속에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날 누군가가 있다는 기대가 피어올랐다.
소년과 별은 연기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연기는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고,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소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드디어 연기의 근원지에 도착했을 때, 소년은 한낱 버려진 캠프장과 바람에 흔들리는 천막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남겨 둔 흔적이 가득했다—부서진 캠프 장비와 반쯤 먹다 남은 식량, 불에 그을린 작은 화로까지.
소년은 숨죽인 채 주위를 살피며 작은 희망을 품었다. "혹시… 누군가가 여기 있었다면 곧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년은 또다시 허망함을 느꼈다.
그때, 별이 천막 쪽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소년도 다가가 보니, 그곳에는 한 권의 낡은 노트가 놓여 있었다. 먼지가 쌓인 노트를 펼쳐보자, 누군가의 흔들리는 손글씨로 써진 글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더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만약 이 글을 누군가가 읽는다면… 부디 살아남기를 바란다. 어디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계속 가길 바란다.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소년은 노트를 손에 꼭 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도, 결국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구나…"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되살아났다. 누군가가 남긴 마지막 흔적처럼 느껴졌고,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겼다.
소년은 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결심했다. "별아, 우리도 계속 가자. 어딘가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분명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별은 소년의 결심에 힘을 보태듯 작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소년과 별은 또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무한한 길과,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소년은 걸음을 재촉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별은 그런 소년을 묵묵히 따라주었다. 그들은 이제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수없이 많은 마을과 도시를 거쳐 가며 기대와 절망을 반복했다.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지만, 돌아오는 건 늘 텅 빈 공터와 쓸쓸한 잔해들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년의 얼굴은 점점 수척해졌고, 그의 마음은 깊은 외로움과 고독에 갇히기 시작했다.
하루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소년은 비에 젖은 몸으로 나무 아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차가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소년은 울지도 않았다. 이제 희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그저 무거운 허탈함만이 가슴을 짓눌렀다.
"별아… 미안해." 소년은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너를 데리고 온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나도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별은 그런 소년의 곁에 고요히 앉아, 물기 어린 눈으로 소년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별은 소년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별에게 소년은 전부였고, 소년에게 별은 마지막까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시간이 지나자, 소년은 결국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더 이상 말을 걸어줄 사람도, 따뜻하게 쓰다듬어줄 손길도 없었다. 소년의 작은 체구는 조용히 고요한 숲속에 머물렀다.
별은 꼬리를 내리고 소년의 곁에 다가가 그의 차가워진 손을 핥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별은 소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듯 고개를 숙이고 그 곁을 지켰다. 소년이 떠난 뒤에도, 별은 떠나지 않고 끝까지 소년의 옆에서 맴돌았다.
밤이 되자, 별은 소년을 등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별은 홀로 남겨졌지만, 그 마음속에는 소년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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