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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항상 무언가를 미루기 일쑤였다. 마감일이 다가오는데도 논문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졸업을 앞두고도 취업 준비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할 일은 산더미였지만, 그는 늘 바쁜 척만 했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같았다. "어려워서 못 하겠어." 또는 "하기 싫어서 안 해." 두 마디로 모든 걸 정당화하며 방어기제를 세웠다.

첫 번째로 논문이었다. 졸업 논문 마감일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준호는 여전히 빈 페이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지도 교수는 여러 차례 피드백을 주며 빨리 초안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준호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민석이 물었다.

"준호야, 논문은 언제쯤 끝낼 거야? 아직 시작도 못 했다고 들었는데."

준호는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주제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손을 못 대겠어. 차라리 쉬운 주제로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

민석은 준호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정말 어려워서 못 하는 거야? 아니면 하기 싫어서 미루고 있는 거 아니야?"

준호는 순간 민석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곧바로 반박했다. "아니야, 진짜로 어렵다니까. 내가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그렇지."

그러나 준호의 변명은 그 이후로도 반복되었다. 친구들이 주말 산행을 가자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바쁜 취업 준비 중에 스트레스를 풀 겸 산에 가기로 했지만, 준호는 처음부터 거절했다.

"난 등산 별로 안 좋아해. 힘들기만 하고, 시간 낭비 같아."

친구들이 한 번 더 설득하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 빼고 다녀와. 난 가기 싫어."

그 순간, 민석이 냉정하게 말했다. "또 하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솔직히 말해, 힘들까 봐 겁나서 안 가는 거지?"

준호는 짜증이 났다. "그게 아니라니까, 그냥 등산 자체가 재미없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민석은 준호의 말을 듣고도 멈추지 않았다. "취업도 그렇잖아. 너 아직 어디 지원도 안 했지? 요즘 일자리 어렵다고만 하고 준비도 안 하고. 진짜 어렵고 무서운 게 아니라 네가 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준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민석의 말은 그의 마음속 깊이 찔려 들어왔다. "하기 싫어서"와 "어려워서 못 한다"는 변명이 더 이상 그를 감싸주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준호는 방에 앉아 혼자 생각에 잠겼다. 모든 핑계와 변명을 떠올리며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짚어보았다. 논문도, 산행도, 취업도. 결국, 그는 어려운 일과 싫은 일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그저 방어기제 속에 갇혀 자신을 위로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준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앞서 나갔다. 민석의 말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어려워서 못하는 거잖아." 하지만 준호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지 못한 채,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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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는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자리에 나갔다. 자리의 분위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시시껄렁한 농담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채워졌다. 연예인 소식, 회사 생활, 주말 계획이 오갔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대화가 한참 진행되던 중, 한 친구가 준호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

"야, 넌 진짜 늘 똑같다. 주말엔 뭐 하냐고 물어도 늘 똑같은 답만 하고. 너 인생에 무슨 재미가 있냐?"

그 말은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준호의 가슴 속에 작은 불씨처럼 불편함이 자리 잡았다. 그는 그저 웃어넘겼지만, 그 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며 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똑같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준호는 거실을 오가며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다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고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분노와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친구의 농담 하나가 그의 일상을 흔들어 놓은 셈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거실을 서성이던 준호는 문득 책장 쪽을 바라봤다. 몇 년 전 사놓고 읽지 않았던 책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고, 그 중 한 권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준호는 무심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이별을 앞두고 준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준호야, 나는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이 멋지다고 느껴지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엔 깊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랐어. 그래서… 넌 스스로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어."

그때 준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요구가 너무 높다고 생각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존경이라니, 그런 게 왜 필요한 건데? 넌 그냥 너무 많은 걸 바라잖아!" 그렇게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끝냈지만, 그 말은 마음 한 구석에 늘 남아 있었다.

준호는 손에 든 책을 천천히 펴고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인간의 시간 사용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책은 사람의 시간이 생산, 유지, 여가의 세 영역으로 나뉘며, 오직 여가만이 자신이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준호는 그동안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써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TV와 인터넷, 가벼운 술자리로 흘려보낸 시간들이 눈앞을 스쳤다.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루 24시간 중, 진정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8시간뿐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준호는 작은 변화부터 시작했다. 자기 전에 책을 읽고, 하루를 돌아보며 짧은 글을 쓰는 습관을 들였다. 주말에도 무심코 TV를 켜는 대신, 도서관에 가서 강연을 듣거나 산책을 나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8시간은 짧게 느껴졌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하루가, 그리고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고, 준호는 다시 친구들과 술자리에 나갔다. 여전히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농담이 오가던 중, 한 친구가 말했다.

"준호, 요즘 너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예전엔 그냥 늘 똑같아 보였는데, 이제는 좀 더 활기차 보여."

그 말에 다른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예전처럼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내가 그동안 시간을 어떻게 써왔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 예전엔 주말마다 무심코 흘려보냈는데, 이제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쓰려고 하고 있어."

친구들은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대단한데? 요즘 뭐에 빠진 거야?" 한 친구가 물었다.

준호는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특별한 건 없어. 그냥 하루에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거지."

술자리는 여전히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준호의 마음속에는 전과 다른 뿌듯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자리, 같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준호는 이제 단순히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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