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은 속기사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법정에서 타자 소리가 경쾌하게 울릴 때면, 그녀는 모든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단어와 문장에 집중했다. 빠르고 정확한 그녀의 기록은 동료와 상사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이는 유정에게 큰 자긍심을 주었다. 그녀는 속기 실력을 갈고닦기 위해 매일같이 훈련했고, 새로운 용어와 법적 용어도 빠짐없이 암기하며 완벽을 추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성 인식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비용 절감을 위해 속기 인력을 줄여 나갔고, 동료들은 하나둘씩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유정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력 없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이라 여겼고, 자신만큼의 열정과 기술을 가진 이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으며 기술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는 모든 속기 인력을 정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유정은 그 발표를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나마저 필요 없다는 거야?"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속기사로서의 마지막 일을 맡은 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타자기를 꺼냈다. 하지만 손을 올리는 순간, 문득 회의실을 둘러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회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기계와 프로그램이 순식간에 그녀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 듯했다.
그날 이후 유정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매일 같이 기록하던 법정도, 회의실도 이제는 그녀와 무관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집 안에 홀로 앉아, 낡은 타자기 앞에서 한참을 바라만 봤다. 타자기의 키보드를 두드리던 감각이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었지만, 그 기술은 이제 쓸모가 없었다.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듯한 공허함이 그녀를 덮쳤다.
유정은 컴퓨터 화면을 켜고 자신을 고용할 만한 다른 직업을 검색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자부심과 기술은 이제 시대에 뒤처진 잔재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녀는 정말로 세상에 남은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왔다. 유정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결정을 내릴 용기를 찾기 위해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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